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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Young Bin's Works Page

Story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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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 Oct 10, 2008
  • 17171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하면 떠오르는 화가가 있으십니까?

 

학창시절 미술 교과서 한 페이지에 항상 이 사람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리는 건 나도 하겠다.. 이런 그림이 왜 그렇게 유명한거야? - 하고 어릴땐 그의 그림을 보며 의아해한 기억도 있는데요.

물론 지금은 괜히 천재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술가중 가장 유명했던 사람.. 천재는 요절한다는 속설을 깨고 90세가 넘도록 장수하며 죽을때까지 천재로 살았고 죽어서도 천재로 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끊임없는 열정과 샘솟는 실험정신으로 미적 영역의 새로운 개념을 발굴하여 19세기 미술의 마침표를 찍은 장본인이자, 천재이며, 망나니요 마치광이이자 현대판 돈 환이었고 동시에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였던 피카소 입니다.

피카소는 8세에 이미 주목받는 예술가가 되었고, 40세에 대단한 부자가 되었으며, 65세 이후 자수성가한 억만장자였습니다. 살아생전 그렇게 성공한 예술가는 보기 힘든데요.. 피카소 같은 인물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피카소가 유명한 화가인건 아시겠지만.. 그의 그림과 사랑에 대해 아십니까? 그는 잠시도 동반자 없이 살 수 없는 인간 지상주의자였답니다. 그는 예술 세계에 있어 정신적 유대감과 함께 육체적 친밀성도 요구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예술에대한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동반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쏟아 부은 사랑이나 우정의 강도가 보통 사람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격정적이고 강력한 것이었고, 이런 소나기성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고 합니다.

 

그를 거쳐간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불꽃같은 사랑은 100년의 사랑을 1년 사이에 다 불태워 버릴 정도로 뜨겁고 격정적인 것이였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럼.. 피카소에겐 몇명의 연인이 있었을까요?? 피카소에겐 모두 7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20살 동갑내기였던 올리비에. 두 번째 여인은 친구의 애인이었던 에바. 세 번째 여인은 발레리나였던 올가. 네 번째 연인은 마흔 살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17살 소녀 마리 테레즈. 다섯 번째 여인은 마리와의 결혼 생활중에 만난 도라. 여섯 번째 여인은 미술학도였던 프랑스와즈 질로. 일곱 번째 여인은 피카소의 나이 여든살에 만난 자클린.

 

사람들은 피카소의 그림은 그의 여인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친구의 연인에서 어린 여인까지.. 그것도 모자라 한 번에 두 여자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그런 바람기많은 피카소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평생을 그를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하는데요. 피카소는 사랑엔 국경도 나이도 상관없다는 말을 실천해 보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와 함께 살았던 여자의 고백이 한결같이 그 와의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한다는 것인데요. 그만큼 피카소의 여자에 대한 열정과 탐욕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합니다. 그가 그 많은 여자들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그건 아직도 수수께끼랍니다.

 

피카소는 20살을 넘기면서 끊임없는 여성 편력을 보여줬는데, 여성 취향이나 편력은 거리의 여자에서 여신(女神) 같은 우아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여자가 바뀔 때마다 그의 그림은 달라졌고, 따라서 주변의 여자들은 피카소에게 서로다른 영감을 불어 넣어 준 셈이었습니다. 피카소와 살았던 7명의 여자들을 보면,  두 여자는 그를 잊지 못해 자살했고, 두여자는 지나친 질투와 그의 대한 강박 관념으로 정신 이상이 되었고, 한 여자는 젊어서 요절했습니다. 프랑수아즈만이 간신히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만 그녀 역시 그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 어느 광고 카피가 언뜻 생각났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거야." 피카소에게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었고, 그를 사랑한 여인들에게 사랑은 피카소 뿐이였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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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와 20세의 동갑내기였는데 그녀는 야성형 여성으로 '장미빛 시대'의 연인입니다.

이 시기는 <아비뇽의 처녀들(1907)>의 작품 시기이기도하고 '분석적 큐비'이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그녀를 주제로 그린 그림은 <부채를 든 여인(1908)> 등이 있습니다.

시각 미술, 영화, 건축을 포함 모든 예술 장르에 큰 영향을 준 큐비즘의 선각자 피카소는 그에게 전설적 명성을 안겨 준 유명한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을 몇 달간 수백장의 데생과 습작 끝에 26세 늦여름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반응은 그를 절대로 지지했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게 그림인가?" 할 정도였고,그들은 분노와 경악으로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마티스 마저 격분했고 브라크도 이건 "우리에게 석유를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 라고 혹평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야말로 지금까지의 모든 지구상의 모든 회화 세계를 붕괴시킨 미술사의 대혁명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우아하고 풍요로운 요정이나 비너스가 아니라 거리에서 몸 파는 천한 여인이 주인공이 되어서 문명화된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는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이 그림의 위대성은 바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3차원의 세계. 즉 평면적 관점이 아닌 입체적 관점인 '원형, 원축, 원구'로 처리해 내는 데 있는데 이런 20세기의 정신을 누구보다 앞서 그림을 통해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세잔의 회화적 비전을 현실화했으며, 지극히 복잡한 다원적 공간을 아주 단순하고 축소된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창출해 내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것을 생각하고 실천해보이는 것. 천재의 조건이 아닐까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다른 세상을 볼수 있게 시야를 넓혀주는 것. 피카소가 인정받는 이유입니다.

 

1912년 31세 피카소는 첫번째 연인 페르난드와 헤어지고 가날픈 미모의 에바와 살게 되었습니다. 친구 마르쿠스의 연인 에바를 가로채 열렬한 사랑을 퍼부었는데요. 에바(1911)는 청순 가련형 여자로 피카소가 정열적으로 사랑한 여인이었습니다.

 

에바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림 <나의 아름다운 여인 Ma jolie(1914)> 옆에는 '나는 에바를 사랑해(J'aime Eva)' 라는 그의 절절한 사랑 고백이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피카소 작품 속의 에바. 이 시기는 '분석적 큐비즘'을 넘어 '종합적 큐비즘'이 무르익는 시기였는데, 기존의 회화를 해체하고 재조합을 연속적으로 이어가면서 신비한 효과를 내었습니다. 에바는 불행히도 1916년 지병인 결핵으로 추운 겨울 12월 14일 죽게 됩니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한 피카소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에바는 피카소의 변화무쌍함과 견디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에바가 병이 난 사이에 피카소는 27살의 파리 태생의 가비 레스피나스라는 또 다른 애인을 두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병든사이 다른 애인을 만들고도 또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비통해한거죠. 그의 변화무쌍한 생명력을 다 받아줄만한 여인이 없었던 것일까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이해할수는 없겠지만 피카소의 진심은 어디 있었던것인지 궁금합니다.

 

에바가 죽은지 얼마 안되어 피카소는 사티가 음악을 맡고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무용단을 안무하고 장 콕토가 쓴 발레극 퍼레이드 [대행진(Ballet Parade)]의 무대장치를 맡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발레극은 전통극과 결별하고 초현실적풍의 현대 전위극을 펼치는 새로운 형태의 무대이였기 때문에 무대 장치가 피카소에게 맡겨졌던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도 또 하나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과거 무수히 사귀던 다수의 여자를 잊은 채 60여명의 발레리나 중 가장 아름다운 25살의 올가에 반합니다. 이 발레곡은 파리에서부터 바르셀로나까지 공연되었으나 흥행에선 완전히 실패했지만, 피카소는 이 순회 공연에 단원과 계속 동행해야 했고 거기서 그의 사랑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었죠. 

드디어 1918년 7월 12일 36세의 피카소는 아폴리네르, 막스 자콥, 장 콕토가 증인으로 선 가운데 파리의 한 교외에서 이미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아 준 올가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세 번째 연인 발레리나 올가(1917)는 귀족형 여자로 피카소를 상류 사회 사실주의 풍에 빠지게 한 장본인으로, 이 시기에 피카소는 그의 동료들로부터 큐비즘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피카소의 작품은 우리의 눈에 익숙한 아름답고 사실적인 그림입니다.  어릴 때부터  천재라 불려왔던 피카소의 실력이 어떤 것인지 엿볼수 있기도 하지요. 누구보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과감히 버릴수 있는 열린 생각이, 20세기 새로운 세상을 여는 시작이 된것 같습니다.

 

네 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1927)는 천진난만형 여자로 피카소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시기에 만났습니다. 피카소가17살 난 마리 테레즈를 만난 것은 너무나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피카소는 라파예갤러리(Galeries Lafayette) 근처를 거닐다가 우연히 지하철에서 금발 머리의 젊고 아름다운 한 처녀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의 얼굴은 그리스비너스 고전 조각에서 만날 수 있는 똑바른 콧날과 푸른 회색 눈을 가진 아주 이상적 미인이었습니다. 피카소는 그녀를 결코 놓칠 수 없었나 봅니다. 마리 테레즈는 첫 구애 사건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마구 내 팔을잡고, "나는 피카소요. 당신과 나는 함께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테레즈는 6달 동안 피카소의 프로포즈 거절 했지만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요. "저는 여섯 달이나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피카소를 거절합니까? 당신은 나를 이해하시지요. 한 여자로서 피카소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피카소는 테레즈가 부모의 동의가 필요 없게 된 18세 생일날 그녀의 허락을 받아 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는 마리 테레즈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 특히 많습니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연인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모델이기도 했지요. 피카소의 명화 <화가와 뜨개질하는 모델(1928)>과 유화 <화가와 그의 모델(1928)>은 바로 마리 테레즈의 성적 환상에서 힌트를 얻어 작품이고, <겨울 앞에 한 처녀(1932)>도 초현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녀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1935년 테레즈는 여전히 젊은 나이인 22살에 피카소의 딸 마리아를 낳았습니다. 테레즈가 딸을 임신하고 있을 때 피카소는 또 다른 여자 도라 마르(Dora Maar)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테레즈의 끊임없는 순종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세련되지 못하고 무식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버렸습니다. 17살의 어린 나이로 피카소를 만난 테레즈는 개성이 형성되지 못했고 성숙할 기회를 뺏긴 채, 그녀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말았죠.

 

다섯 번째 연인 도라 마르(1936)는 지성형 여자로 피카소가 파시즘 광기와 싸우던 시절에 만났고,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1937)>를 그리는데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한 달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1937년 4월 26일 히틀러가 프랑코를 돕기 위해 3시간 동안이나 무차별 융단 폭격으로 작은도시인 바스크를 야만적으로 공격해, 그 당시 이 도시 7천명 주민 중 1천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도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분노한 피카소가 미친 사람처럼 24피이트(7.31m)와 11피이트(3.35m)의 화면에 그의 대표작품 <게르니카Gernica(1937)>의 완성을 위한 혼신의 열정을 다 쏟았습니다. 이 <게르니카>는 파시즘 독재와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피카소를 두고 도라 마르와 마리 테레즈의 싸움은 나날이 격렬해는데 당사자인 피카소는 느긋해 했습니다. 테레즈는 순정을 바쳐 피카소를 평생 흠모하다가 끝내 피카소가 죽은 후에도 그를 따라 보살펴야 한다며 자살한 순애보의 불행한 여인이 되었고, 또한 날카로운 지성을 지녔던 여인인 도라 마르마저도 피카소와의 이별로 인해 정신 착란증을 일으켜 정신 병원에서 치료받는 불행한 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섯 번째 연인인 프랑스와즈 질로는 피카소의 옛 애인들과 달리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21세의 자유 분방한 여자로 법대를 다닌 지적인 여성이었습니다.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 친구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데 제 나이보다 3배나 많은 당신과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프랑스와즈도 결국 그녀의 친구였던 즈느비에브와 서로 모르게 피카소가 따로 연인 관계를 맺은 것을 알게 되면서 미련 없이 그를 떠나고 마는데요. 피카소의 연인들중 유일하게 피카소를 먼저 떠난 여인입니다. 피카소는 심지어 자살하겠다고 그녀를 위협했지만 그것이야말로 당신(피카소)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며 응수하며 피카소의 그늘에서 빠져나갔지요.  이에 화가 난 피카소는 2달 동안 180여개의 데생을 그렸댔고, 이것들은 훗날 지옥같은 증오의 계절에 피카소가 남긴 삽화적 일기로 남아 사생활의 한 단면을 생생히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카소의 첫아들 파울로 보다 나이가 적은프랑스아즈는 60대 중반인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만을 낳았습니다.

 

일곱 번째 연인인 자클린은 피카소보다 40년 연하로 여자로 절대 헌신형이었습니다.

1961년 80세의 피카소는 마지막 여자가 될 자클린과 발로리스 시청에서 비밀 결혼을 올렸고, 그 날 신문을 장식한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 놀라게 하였습니다. 피카소에게 절대 헌신적 여자였던 자클린은 피카소의 생의 훌륭한 동반자였는데요. 이 시기는 피카소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시기였고, 위대한 화가의 말년을 창작 활동 하나에만 전념하도록 도와줌으로 피카소를 지극히 행복하게 한 여인이였습니다. 또한 이때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과 고전 작가의 재해석에 심취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남 프랑스 별장에서 삶을 마쳤구요, 눈 내리는 4월 10일 생 빅투아르 산기슭 보방 오그리라는 산비탈에 묻혔습니다. 그는 유언처럼 "진실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피카소의 장례식에 마리 테레즈의 딸 마야, 프랑스와즈가 낳은 아들 클로드 와 딸 팔로마는 자클린의 거부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술에 취한 피카소의 장남파울로가 자클린에게 출입을 완강히 거절당하자 더 심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결국 피카소가 죽은 지 2년만에 죽고 말죠. 이 사건은 결국 파울로의 아들 파블리토(피카소의 손자)까지 삼 개월 후 독약을 마시고 자살에 이르게 합니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 죽은 지 3년 후, 피카소를 만나지 바로 50년 되는 그 날. 딸에게  "사랑하는 내 딸 마야! 너를 영원히 사랑하지만 또 하나의 사랑을 찾아 떠난단다. 아버지와 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저 세상에 그가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면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다. 그는 내가 있어야 편하게 잠잘 수 있어 그는 영원히 내 곁에 있을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차고에 목매 자살했습니다.

 

또 그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자클린은 피카소가 죽은 후 검은 커튼으로 방을 어둡게 하고 식탁에 피카소 자리를 마련한 채 피카소의 망령을 잊지 못해 노래를 들려주거나 기이한 의식을 치르곤 하다가, 피카소가 없는 현실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86년 권총 자살로 세상 마감하고 맙니다.

 

이렇듯 그의 유족들과 주변의 여인들은 그의 사후 비참한 최후를 맞게되는데, 피카소의 어떤 점이 그를 잊지 못하게 하고 사랑하게 했는지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사랑받고 사랑한 피카소는 과연 행복했을까요?? 그는 과연 7명의 여인을 진정 사랑했던 것일까요.. 피카소만이 알수 있는 진실인것 같습니다. 피카소의 마지막 말처럼 진실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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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가 죽었을 때 남긴 작품은 거의 50,000점 정도였는데요. 페인팅이 1,885점, 조각이 1,228점, 도자기가 2,280점, 동판화가 18,095점, 석판화가 6,112점, 리놀륨 판화가 3,181점, 149개 드로잉 노트, 스케치 4,659점이라는 실로 방대한 양입니다.

 

그에게 있어 에로스는 모든 생명력의 근원이며, 그가 추구하는 미의 힘이며 원천이고 예술의 극치감을 맛보는 징검다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책감이 없는 태초의 원시 세계를 꿈꾸었고 섹스의 기쁨은 창조의 기쁨이고 더 나아가 성스럽고 아름다운 창조 행위라고 여겼으며,에로티시즘을 통해 인간과 우주와 예술이 결합을 시도하기도 했는데요. 창조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신념 속에 살았습니다.

 

성의 혁명은 20세기 최대의 담론이 되었지만, 그는 이런점에서 선각자였다고 할수 있겠네요. 피카소는 현대사에서 아인슈타인, 다윈,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죠.

 

평면 회화 해체와 신미술의 창조 같은 지각 변동을 준, 혁명이라고 할수 있는 외형적 모방을 하던 종래의 화법을 완전히파괴하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해체하여 형태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큐비즘을 발전시켰습니다. 음악에서의 쇤베르크와 바르톡, 문학에서의 베케트와 카프카의 업적과 동일시되는 미술에서의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시대 갈등, 불안, 전쟁, 고난, 아픔을 같이 했으며, 끝없는 삶과 예술에 대해 한정된 인생의 지평을, 무한대로 열어준 천재 예술가였으며. 여인을 너무나 사랑한 열정과 광기의 소유자였고, 미의 힘을 통해서 돈과 전쟁과 사랑까지 지배한 영원한 독재자였습니다. 그의 긴 투쟁의 삶은 20세기 바로 그 자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모든 주제를 망라해서 다루고 있고 또한 거의 모든 양식을 시험하면서 현대 전위 미술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는데요.

 

이에 대해 그는 "나는 미리 세워 놓은 미학의 기반에서 선택하지는 않는다. 하나님도 사실은 또 하나의 예술가일 뿐이다. 그는 기린과 코끼리와 고양이를 발명하셨다. 그 분은 어떤 스타일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조각가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 시대의 문화적 불만과 태도에 호흡을 맞추고 있는 독창적 예술가다." 라고 자신의 작품을 옹호했습니다. 그가 구사한 삶과 예술에 대한 당당한 발언이자 자기 정체성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는 말년의 자신의 죽음과 싸우는 자신의 모습까지도 그의 자화상에 솔직하게 담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렘브란트 당신은 죽음을 냉소했지만 난 죽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싶소" 죽음조차 뚫어지게 응시한다는 말은 그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언제 어느때고 앞을 보는 사람, 현실을 직시하고 솔직하게 발언하는 사람. 자신이 원하는것과 하고 싶은것을 참지 않는 사람. 그 과정에서 누군가 상처받고 자신조차 힘들어질지라도 회피하지 않는, 항상 정면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피카소를 원망하지 않고 사랑한것이 아닐까요? 온 몸을 던져 사랑했고 또 사랑받은 사람..

 

그들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행복할때도 불행할 때도 열정적으로 살았을 것이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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