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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 05, 2008
  • 42580

 <케테 콜비츠 (K the Kollwitz) 의 논문>

 서 론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케테 콜비츠(K the Kollwitz) 작품속의 인생과 삶의 예술에서 여러 가지 사회 구조적인 모순과 불평등한 제도에 희생되고 있는 인류의 모습을 자신의 주변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 일반 하층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케테 콜비츠만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미의 어의를 해석함에 있어 우리는 일상적으로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를 즐겨쓰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름답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와 범주를 생각해 본다고 했을 때 지극히 단순한 일인 듯 하지만 멀지 않아 그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체계를 이루는 총체적인 요소들에 대한 사고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각이 일게 될 것이다. 본질적인 접근이 얼마만큼 절대적인 근간이 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내 작품의 주제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그것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오로지 노동자들의 삶이 그렇게 느껴지며, 그들의 단순하면서도 꾸미지 않는 태도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이렇게 자신의 사회와 환경이 아닌 노동자 그들속에서 찾았다는 것이 참으로 본질적인 인간 케테 콜비츠가 위대함을 지니게 된 것이다.
 케테 콜비츠는 사회 참여적인 성향의 작품으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주장을 관철시키려하는 선언주의자나 삽화가적인 이미지가 강하였으나, 실제 그녀의 동판, 석판, 목판 판화작품등을 살펴보면 나름대로의 조형성을 가진 깊이 있는 작품세계를 볼 수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그녀가 핍박받고 궁핍한 그들이 아름다움으로 보여지고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고가 내면에 가득차 있어서이다. 회화를 고집하던 그녀가 판화의 세계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노동자 그들에게 빛을 주고 같은 공동체로서 삶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치지 않는 작품에 대한 열정을 평생 그들과 함께 나누고 작품을 해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케테 콜비츠 자신의 삶과 일치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케테 콜비츠의 예술과 삶을 연구해 보고  작품의 세계를 통해 그녀의 내면과 정신 세계를 살펴 보고 케테 콜비츠의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를 알아 보고자 한다.

 본론

 1. 케테 콜비츠의 인생과 삶에 있어서의 예술
 
(1) 시대적 배경
  1848년 3월 시민혁명이 베를린에서 일어나자, 그것이 사회혁명으로까지 확대될 것을 두려워한 당시 프러시아 국왕 빌헬름 4세는 민주헌법의 제정과 의회 소집 등 자유주의적 민주개혁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전 독일 연방의 대표자들은 프랑크푸르트의 파울스 교회에 모여 민족의회를 열어 헌법제정 등 민주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렇게 열광적으로 민주통일 운동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복고적 봉건세력, 특히 토지 영주 및 귀족들의 비협조 내지는 반동작용으로 자유통일운동을 제창하던 민족의회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자유주의적인 개혁과 새로운 제도로 인해 개인은 전통적인 신분 질서나 봉건시대의 촌락공동체와 같은 굴레에서는 해방되었으나, 초기 자본주의의 경제체제 속에서 또 다시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노동시장의 단순한 상품처럼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자본주의가 완전히 제도화되어 정착되기 전이므로, 국가가 노동자들의 문제에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생계를 위한 노동자들간의 과잉경쟁은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가혹하리만큼 열악한 노동조건을 더더욱 심화시켜가고 있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신념과 희망이 되어 준 것은 바로 사회주의였다. 사회 민주주의의 승리와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명목은 노동자 계층의 미래의 행복을 위한 전망으로 여겨졌다. 노동 계급에의 소속감과 국제적 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신조는 그들의 독자적인 운명을 견뎌 나가게 했다 숙명적인 동지로서의 연대 행동의 필요성과 그 의미를 확신한 최초의 계급의식은 개인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집단적인 자아의식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집단적 사회의식은 개인의 자포자기나 절망을 극복시켰다. 사회주의는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노동자들의 각성에 중대한 의미를 준 것이다.
 
(2) 화가로서의 성장과정
 케테 콜비츠는 1867년 7월 8일 동프러시아에 위치한 쾨니히스버르크에서 아주 진보적인 분위기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북구인의 감성을 지녔다. 오빠 콘라트와 언니 율리에, 동생 리제와 함께 자란 그녀의 집안은 중산층 지식 계급에 속하였지만 당시의 진보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그녀의 집안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계급보다는 그 사회에서 억압받는 자, 소외된 자에 훨씬 더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쾨니히스베르크에 최초의 자유 신앙 교구를 일으킨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Julius Rupp, 1809 - 1884)는 신학자이자 탁월한 목사로서 일생을 자유사상 운동에 바쳤다. 그는 교의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신앙 때문에 국가와 교회의 박해를 받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신조를 굽히지 않았다. 케테 콜비츠의 어린 시절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말 한마디에도 신념이 담겼으며 내면에서 우러나지 않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는 외할아버지 루프의 성자같은 진지함이 케테 콜비츠의 작품과 삶에도 그대로 배어 있다.

 케테 콜비츠의 아버지 칼 슈미트 역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진솔한 사람이었다. 그는 법관생활을 청산하고 미장이의 삶을 택한다. 당시의 진보적인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행위이므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국가 공복으로서의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이러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 사상은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획일적인 공교육을 강요하지 않고 자녀들의 의견과 소질에 관심을 갖고 배려해 주는 아버지였다.
 카타리나 루프 슈미트 역시 케테 콜비츠의 어머니로서 늘 같은 모습으로  그녀의 곁에서 정신적인 힘이 되어 주었다. 어머니인 카타리나는 예술적인 관심과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집을 직접 꾸몄으며 고대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한 작품도 집안에 장식해 놓았다고 한다. 

 케테 콜비츠의 예술적 소질은 아주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신적인 것을 높이 사던 부모님들은 적절하고도 진지한 보살핌으로 이끌어 주셨다.
 14살 때부터 케테 콜비츠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그녀 나이 15세때인 1881년 동판화가인 루돌프 마이어(Rudolf Mauer)에게서 19세기 후반기의 전형적인 미술수업이라 할 수 있는 목탄과 연필을 이용한 드로잉과 석고데생등의 수업을 통해 기본적인 기법을 익히게 된다. 1882년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고 있던 에밀 나이데(Emil Neide)의 개인지도를 받는다. 에밀 나이데는 프랑스 화가인 구스타브 꾸르베풍의 사실주의 화가로서 케테 콜비츠에게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적인 주제를 가지고 정교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릴 것을 가르친다. 본격적인 미술교육은 1885년 - 1886년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베를린으로 가서 여성미술학교(Zeichnen und Malschule des Vereins der Kunstlerinnen in Berlin)에서 예술수업을 받는다. 오빠 콘라트가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지만 얼마 안 있어 런던으로 간 후 그곳에서 노년의 엥겔스와 교제하며 지냈으므로 케테 콜비츠는 기숙사에 살면서 여자예술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 학교에서 칼 슈타우퍼 베른(Karl Stauffer Bern)의 가르침을 받았다. 슈타우퍼 베른은 케테 콜비츠의 드로잉을 보고 판화를 권하였다. 또한 슈타우퍼 베른은 그녀가 막스 클링거(Max Klinger) 판화에 관심 갖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녀는 한 전시회에서 막스 클링거의 판화 작품 삶< The life >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이 기간을 베를린에서 보낸 후 다시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당시 의학도였던 칼 콜비츠와 약혼한다. 그리고 다시 뮌헨의 여자예술학교에서 1888년 - 1889년까지 작업하였다. 케테 콜비츠는 시간 나는대로 막스 클링거(Max Klinger, 1857 - 1920)의 <회화와 판화>를 읽었다. 1890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에 돌아와 노동자들과 친숙하게 지냈다.  1891년 북부 베를린으로 옮겨와 결혼을 하고 남편 칼 콜비츠 박사와 함께 바이센부르크가 25번지에서 살았다. 여기에서 칼 콜비츠는 의료보험조합 소속의 개업의가 되었고, 케테 콜비츠는 동판화와 석판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 한스와 페터도 자랐다.

 

2.케테 콜비츠의 작품세계

(1)1888 - 1908

 <직조공 봉기>
 문학작품을 소재로 하는 케테 콜비츠의 작품 세계는 뮌헨 미술학교시절 에밀 졸라의 동명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1889년의 <게르미날>이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1893년 2월 바로 '자유무대'에서 초연된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직조공들> (Die Weber)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는다. 먼저 시작한 <게르미날> 연작을 버려두고 <직조공 봉기>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 사건은 무대공연이 어떤 강력한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그 작품에서 내용에 대해 시사를 받기는 했어도, <직조공 봉기>는 독자적인 작품이다. 마치 6막극처럼 구성된 여섯 점의 판화로 일관된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1893년 - 1897년까지, 4년 동안이나 이 작품에 매달렸다. 전적으로 직조공들 편에 서서 보았다. 연대와 형제애, 이것이 <직조공 봉기>의 인간적 고백이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명확한 진실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바로 동일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녀의 작품의 민중성이 그토록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케테 콜비츠의 세계관이 작품 속에 사회적 상황 즉, 시대의 사회 투쟁과 일치되어 녹아 들어가 있고 아울러 적합한 표현수단으로 형상화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농민전쟁>
 <직조공 봉기>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화폭에 담아낸 케테 콜비츠는 이제 독일 역사상 또 하나의 격렬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인 <농민전쟁>을 판화로 다루게 된다. 그녀가 <농민전쟁>을 연작 판화로 시작한 1900년대 초는 독일에서도 사회주의가 위세를 떨쳐서 계급투쟁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던 때였다.  대형 동판화 연작인 케테 콜비츠의 <농민전쟁>은 <직조공 봉기>와 같은 구성으로 짜여져 있다. 진행과정을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감정내용의 계기들을 아울러 포착하고 있는 일곱 개의 화면으로 구성된 드라마와 같다.

 

(2)1908년 - 1914년

<가내노동> <임시숙박소>
  1909년 케테 콜비츠는 유명한 풍자 시사주간지인 [짐플리시시무스](Simplicissimus)에 사회비판적인 그림을 싣기 시작했다.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레이션에 치중하는 이 잡지가 풍자와는 거리가 있는 케테 콜비츠의 그림들을 게재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얻은 명성을 입증해 준 셈이다. 그 잡지가 자신의 성향과 부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 일에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다. 잡지의 일은 밖으로 드러난 대도시 생활의 무수한 비극들을 신속하게 완성하고 대중적으로 표현해내서 다수 대중 앞에 내보일 수 있다는 점이 그녀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케테 콜비츠는 그녀가 그린대로 이렇게 설명한다. 한 장면을 거의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 완성하는 이 방식은 모든 해석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대부분 극단적이고 강렬한 계기들 속에서 인생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케테 콜비츠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자신이 고통스러웠으며, 타인의 열망과 기쁨이 곧 자신의 열망과 기쁨으로 되었다. 그녀가 삽화적인 듯 보이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보편적인 것, 인간적인 것, 사회적인 것을 간파해내곤 하였다.

 

(3)1914 - 1945

<전쟁>
 제 1차 세계대전은 케테 콜비츠에게 개인적으로 커다란 충격이자 상실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병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케테 콜비츠의 둘째 아들 페터도 그들 무리에 끼고자 했다. 페터의 결심은 확고했다. 둘째 아들 페터는 전쟁터에 나아가 전사를 했다. 그녀는 전쟁을 통해서 고통스런 변신의 과정을 겪었다. 아들의 죽음은 그녀의 삶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1922년에서 1925년에 걸쳐 케테 콜비츠는 <전쟁> 연작 판화를 완성했다. 전쟁에 대한 항변으로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이 현실을 외면하거나 변형시키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케테 콜비츠는 전쟁 그 자체를 소재로 삼아 전쟁에 반대했다. 7점의 목판화로 제작된 이 연작 판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있다.

 

3.케테 콜비츠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
 
 원래 미술사란 양식의 변화를 쫓는 것이 상례인데 반해서 케테 콜비츠는 양식의 변화에 민감하지 않고 대신 그것으로 담아 낼 내용에 더 충실했다. 그녀는 항상 자기 자신과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시대의 삶에 충실하고자 애쓴 작가였다.
 예술이란 초(超)시대적이며 초계급적이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하고 중립적이라는 신념 아래 창작활동을 해서 결국 개인주의에 빠지게 되고 사회에서 고립되어 관객에게서 멀어져가는 당시의 작가들과는 달리 그녀는 작품이 사회에 밀착해서 그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를 바랬다. 소용돌이치는 사회에 직면해서 어떤 가치판단도 내리지 못한 채 무기력해지는 당시의 예술가들과 달리 케테 콜비츠는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태에서 눈을 돌리려 하지 않은 작가였다. 케테 콜비츠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나 예술사적으로서나 일대 변혁 시대였다. 18세기 말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은 말 그대로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 있었으며 미술사조에서도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에 이어 혁명의 와중에서 생겨난 19세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사회를 향해 자기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내더니, 인상주의가 현실에서 발을 빼고 모더니즘 미술을 예고하면서 등장했다. 세잔느가 길을 튼 큐비즘 정신을 브라크와 피카소가 번성시키면서 파리를 중심으로 숱한 미술양식들이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게 되었다. 표현주의, 야수파,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래파 등이 20세기 전반의 미술계를 풍미하고 그에 따라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 또한 다양해졌다. 이같은 미술사조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케테 콜비츠는 자신이 택한 표현양식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꾸준히 자기의 길을 갔다. 당시 여러 가지 양식의 실험이 작가들에게 표현 방법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데 기여한 바 크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앞으로 내달린 표현 방식은 작품내용의 이해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결국 작품은 관객에게서 멀어져 갔다. 미술작품은 관객들이 살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반해 케테 콜비츠느 자기가 몸 담고 있는 현실에 눈을 고정시키고 거기에서 테마를 구했으며 동시대인들에게 자기 나름으로 이야기를 걸었다. 20세기 전반에 동료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던 양식의 변혁이나 매체의 실험이 케테 콜비츠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던 것이다.

 모더니즘 수용에 바빴던 우리 화단에 케테 콜비츠가 널리 알려진 것은 현실을 방관 내지 외면해 온 모더니즘에 반기를 든 소위 민중 미술이 당국의 탄압을 받던 80년대 초에 들어와서이다. 작품을 통해서 무언가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자 한 작가들이 잡혀가고 작품이 압수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작품의 중심 테마로 삼았던 케테 콜비츠라는 독일의 여성 작가에게 관심이 쏠린 것은 늦기는 했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케테 콜비츠는 사진이나 자화상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모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아주 차분한 품성을 가졌다고 한다. 그 당시의 유행이나 세태에 초연해서 옷차림은 항상 수수했으며 자신의 고유한 취향을 살려서 무색의 수직 옷감을 입는 등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 또한 작가의 심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따뜻하고 온화하면서도 약간은 비범하다고 할 정도로 현실 사회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집안 분위기는 케테 콜비츠의 내성적인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당시의 사회에 관여하고자 하는 독특한 성격을 형성한 듯 싶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분위기 또한 작가의 성격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자화상이든 하층민들의 비참한 생활이든 아니면 억압의 현실을 떨치고 일어서는 봉기장면이든 간에 감정, 고통, 울분 등을 작품 밑바닥에 깔아 놓아서인지 작품 전체가 착 가라앉은 듯하면서도 보는 이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그녀의 작품은 강인한 힘을 표출하면서도 시끄럽지 않도록 하는 작가 특유의 연출력을 보여준다. 케테 콜비츠는 천성적으로 젠체하거나 허황되고 꾸민듯한 어색함을 못참아했다. 특히 그녀는 자신이 속해 있던 중산층이 그 같은 성향을 두드러지게 내보인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계급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중산층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매력을 갖지 못하며 부르조아의 생활은 대체로 자신이 볼 때 현학적이었다고 그녀는 후일 회고했다. 또한 충분한 교육을 받은 상류 계급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녀의 생각에 그들은 자연스럽거나 진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도 못하며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인간적이지 못했다. 아마 형제애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던 작가가 보기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군림하면서 이익만 추구한다는 뜻에서 였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이 그랬듯이 그녀도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에 전폭적으로 마음이 쏠려 있었고, 더구나 자신이 의사 남편과 베를린의 아주 가난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런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매춘이나 실직같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슬프게 했다고 술회하면서 케테 콜비츠는 자신은 끊임없이 하층민들을 그림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했으며 그들을 그리고, 또 그리는 것만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못가진 자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 뿐이라고 믿었던 그녀는 사회주의 운동을 진심으로 지지했으며 자신의 예술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그녀에게 중산층이나 상류 계급과 달리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물론 케테 콜비츠가 물질적인 궁핍이나 빈곤만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 이외에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기 마련인 인간 영혼의 궁핍, 피치 못할 이별, 죽음 등도 사람들에게 불행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동생 리제가 많은 사람들이 언니 그림의 주제가 사회적으로 불운한 사람들의 운명에만 쏠려 있다고 지적했을 때 그녀는 그 점에 대해서 "슬픔은 사회적인 불행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개인적인 불행이 가져다 주는 슬픔이 인생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층민들이 물질적 궁핍과 박탈로 겪는 고통을 즐겨 다룬 작품들에서는 그 고통의 압박감이 워낙 큰 데다 그림이라는 표현방식이 갖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살면서 겪게 되는 슬픔을 다양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직조공 봉기> 연작 판화 중 첫 번째인 <궁핍>같이 극도의 가난이 지배하는 화면에서는 다른 어떤 요소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케테 콜비츠를 가리켜 노동조합 간부를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녀의 <직조공 봉기>나 <농민전쟁> 연작 판화가 작가에게 악명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는 평이 있고 또는 연작 판화로 대표되는 초기의 사회성이 짙은 작품들보다는 어머니와 아이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나 평화를 갈구하는 말년의 작품이 더 좋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케테 콜비츠의 전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흐름은 예술을 통한 사회에의 봉사다. 즉 그녀는 예술의 효율성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했던 것이다.

 세기 말을 지나면서 표현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이 다양해졌고 화면에서 드러난 내용은 일반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르네상스로부터 고수 되어온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는 수법은 대상이 처해 있는 순간을 포착한다는 인상주의를 지나면서 그 지주(支柱)가 무너져 버렸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화면에다 실제와 근사(近似)하게 표현하려는 기법은 대상에 시간 개념이 도입되면서 붕괴된 셈이다. 큐비즘의 시작은 서양 미술사에서는 일대 혁명이라고 받아들여졌다. 표현 방법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큐비즘을 가리켜 철학에서의 현상학적 사고와 맞먹는 20세기 미술에서의 혁신이라고 그 새로운 표현기법에 커다란 무게를 두는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큐비즘은 사실 서양 미술사에 국한해서 보면 대단할 지 몰라도 서양 이외의 미술작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으로, 큐비즘의 둥장으로 서양 미술이 여타 세계의 미술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큐비즘 자체를 그다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큐비즘에 대한 평가야 어떻든 간에 그 새로운 양식의 등장으로 해서 인상주의에서부터 시작된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불화는 깊어만 갔다. 도대체 작가가 그림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가를 몰라서 허둥대던  평론가와 저널리스트들이 정신나간 사람들이 벌이는 잔치쯤으로 매도했던 인상파 전시이후 예술작품과 일반 관객 사이에는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을 설명해 주는 작품 해설자겸 평론가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할 만큼 작품의 이해가 힘들었다. 관객이 작품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큐비즘은 사실 그 접점에서 다시 다른 세계의 미술과 결별하고 만 셈이다. 수용자와 그런 식으로 갈등을 겪는 작품은 사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가세함으로써 예술작품에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적으로 도입되면서 작품에서 대상이 아예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예술은 현실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예술과 현실 사이에는 벽이 가로 놓이게 되었고 관객은 예술이란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예술의 전개에 대해 그런 예술작품이야 말로 순수한 것이며 인간 혹은 인간 감정의 개입이 차단됨으로써 예술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술의 비인간화를 추앙해 마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 배제된 예술에 우려를 나타내면서 그런 예술은 마치 물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구할 생각은 않고 그 자체를 예술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다. 예술에 대한 논의는 구질구질한 인간세계를 예술세계에까지 가지고 가야만 하겠느냐는 생각과 인간이 빠진 예술은 공허할 뿐이라는 주장으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정의 종식으로 바이마르공화국이 설립되고 좌우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독일 미술계에도 수용자들에게 인기를 더해가는 부르조아 모더니즘과 그와 발맞추어 발전해 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예술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자신의 작품이 비록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 예술에서 말하는 당파성을 배제했던 케테 콜비츠는 문화적인 혁명가도, 그렇다고 모더니스트도 아니었으며 따라서 이들 두 가지 입장 모두에 반대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슈미트 로틀루프(Karl Schmidt Rottluff, 1884 - 1976, 독일 화가로 다리파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의 작품들과 같은 의미에서 순수한 예술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 역시 예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케테는 자신의 작품이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이고 자신은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같은 선언이 그녀 작업의 기본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이해관계가 얽힌 당파가 아니라 인간애일 때 그것은 예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케테 콜비츠는 어느 작가보다도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거의 완벽하게 보는 이에게 전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이 자기가 살았던 한 시대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이 그 시대를 넘어 지금에까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작가가 특수한 현실 내지 대상을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케테 콜비츠는 자신의 작품이 단지 윤리적인 명령에 근거한 시사적인 예술이나 정치적인 선언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들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따라서 어떤 특정의 사안을 위해서 제작된 작품들도 보편적인 가치, 즉 충족되지 않은 필요사항들, 다시 말해서 영구적인 평화라든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정으로 인간다운 생활상태를 향한 필요사항들을 담고 있다.

  케테 콜비츠가 그림들을 그린 것은 정치적으로 확고한 신념에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휴머니즘의 발로였지 싶다. 그녀는 그림을 그릴 때 자기가 그리고 있는 겁에 질린 아이들과 함께 울면서 자신에게 지워진 짐을 깨달았으며 자신에게는 선전자가 될 책임을 회피할 권리가 없음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그녀가 견지하고 있는 휴머니즘 내지는 인류애에 다름 아니다. 

 인생에서 케테 콜비츠의 창작생활을 이끌었던 근본적인 힘은 무엇보다도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명령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인 의식을 지닌 대부분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갈등하는 사회적 패턴을 겪었으며 거기에 대한 개인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사회적 양심 규범은 선악에 대한 작가 개인의 평가였지 조직화된 대중운동의 전술은 아니었다. 그녀가 계급투쟁이라는 혁명적인 제스쳐를 이해하고 그것에 동조했다고 해도 그것이 그녀 작품에 원천적인 동기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외할아버지가 끼친 기독교적인 정신은 후일 만나게 된 유물론과 결합해서 케테 콜비츠의 사회적 정의감을 크게 강화시켰다. 그녀는 많은 고통을 겪었고 말년의 자화상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정도의 철학적인 초연함에 도달했다. 이같은 초연함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작품이 우울하고 숨막힐 듯이 보일 뿐이다. 인생의 다양한 국면중에서 케테 콜비츠에게는 이 음울한 측면이 크게 다가 왔으며 이것은 그녀의 한계이자 또한 그녀의 전망의 기본이다. 어느 예술가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나름의 전망이 있는 법이고 그 전망은 그에게 한계로 작용하기 마련인 것이다.
 1942년 여름 둘째 아들 페터의 이름을 물려 받은 큰 손자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또 잃은 케테 콜비츠는 1945년 4월 그 전쟁이 끝나기 직전 이 세상을 떠났다.

 

 결론

 케테 콜비츠의 작품 속에는 인간이 중심이다. 인간의 작품을 철저하게 지배한다. 인간의 현존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묘사함으로써만이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성실함에서 비롯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서는 예술과 삶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
 예술 자체의 문제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예술장치들도 유행과는 무관한 것들을 사용하였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녀가 자기 시대에 가장 깊숙이 뿌리 박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인간의 운명과 그 미래 였다. 가족적 전통과 생활 환경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운명이 무엇보다도 유물론적으로 결정된다고 느끼고 그런 관점에서 자신의 소질을 닦아 나간 케테 콜비츠는 항상 구체적인 사회현실로부터 자신의 재능이 유리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삶과 예술에서 언제나 권리를 박탈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편에 섰으며, 수탈당하는 사람들의 진보적 투쟁에 동참하였다.

 사실 케테 콜비츠는 어느 작가보다도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거의 완벽하게 보는 이에게 전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이 자기가 살았던 한 시대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이 그시대를 넘어 지금에까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작가가 특수한 현실 내지 대상을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케테 콜비츠는 자신의 작품이 단지 윤리적인 명령에 근거한 시사적인 예술이나 정치적인 선언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들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따라서 어떤 특정의 사안을 위해서 제작된 작품들도 보편적인 가치, 즉 충족되지 않은 필요사항들, 다시 말해서 영구적인 평화라든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정으로 인간다운 생활상태를 향한 필요사항들을 담고 있다. 

 케테 콜비츠는 예술 그 자체를 위해 생산되는 모든 예술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녀는 오로지 인간과 그의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케테 콜비츠는 예술창작에서 인간의 현존을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을 묘사함으로써만이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이 오늘날에도 고유한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동일한 시대에 상이한, 심지어는 대립되는 예술적 표현방식들이 비록 어느 것은 유행에 맞고 어느 것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예술작품은 오래도록 지속된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성실함에서 비롯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서는 예술과 삶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 그녀의 삶과 예술이 아주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녀의 작품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즉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전통과 특정한 사회적 출신을 지닌 인간으로서 겪었던 것들을 형상화했다는 의미에서 자서전적이다.  케테 콜비츠의 예술에서 느껴지는 위대함은 그녀의 인간됨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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