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Kim Young Bin's Works Page

Article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조형이념

 

-서론-

   직선, 직각, 삼원색(빨강, 노랑, 파랑), 무채색(흰색, 회색, 검정)의 엄격한 제한속에서 작업하면서, Piet Mondrian은 개성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이고 작품의 외형적인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모방할 수 없으며 또한 20세기 회화, 조각, 건축, 응용미술 등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 회화 양식을 창조했다. 미셀 쉬포르(Michel Seuphor)의 말과 같이 표현주의적 추상이 '부르짖음'이거나 '몸짓'이었다면 기하학적 추상은 추상회화의 '문법' 이거나 '논리'이다. 몬드리안은 이 새로운 문법의 확립에 놀랄 만큼 집념을 불태우며 모든 추상회화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몬드리안은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확립자로서, 끊임없이 객관성을 추구한 화가였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회화 방식을 새로운 조형, 혹은 신조형주의라고 불렀으며 그런 방식을 통해 '순수한 리얼리티', 즉 '모든 형태의 배제'에 의해 '상반된 것들간의 등가에서 비롯되는 조화'를 탐구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예술가로서  몬드리안의 인생은 한 가지 목표에만 몰두하는 탐구가로서, 처음에는 막연하게 알고 있었으나 곧 명료하고 분명하게 인지하게 된 목표를 달성하고 그가 직면한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며, 그리하여 중단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전향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연마하며, 항상 새롭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그의 창작 생애의 후반기에는 놀라운 대작들이 만들어졌으며, 각 작품들은 그 이전의 작품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또한 일관되게 발전되었다. 그의 자전적인 기록에서 몬드리안은 인생과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을 간단한 말로 '항상 더 멀리'라고 요약해 놓았다.

 

-본론-

<몬드리안의 예술관을 형성한 기본 사상들>

1. 종교적 세계관

   몬드리안은 정통적인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장이었으며, 네덜란드의 캘빈파 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브라함 코이페르의 열성적인 추종자였고, 또한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일생동안 몬드리안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가 그의 예술 속에서 승화시킨 것은 엄밀히 말해 그가 받은 교육의 특성들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추구, 보편적인 시각을 찾으려는 노력,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수반되는 사고의 완벽한 강직성은 모드 네덜란드의 청교도적 생활 방식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몬드리안이 '리얼리티의 참모습'이라고 부른 것은 '천지창조가 신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이라는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예술가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추구하는 진정한 리얼리티는 자연의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형태들로 인해 오염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술가는 이와 같이 일시적이고 덧없는 현상적 형태들을 피하고, 진정으로 근본적인 것을 추구해야한다. 사실상 새로운 추상미술인 신조형주의의 결정적인 조형수단은 자연의 현상적인 형태들에 대한 거부이다. 몬드리안에게 있어 사물들의 현상적인 형태의 모사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조화에 대한 오염이었다. "바로 사물에 대한 심오한 사랑 때문에, 비구상 미술은 그 사실들을 어떤 특정한 모양으로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써클>, p53). 그의 다른 글들에서도 되풀이되는 이 말은 몬드리안이 예술가로서 밟아온 길에 방향을 제시해주게 된다.

   몬드리안의 청교도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더욱 중요한 점은 그의 사고와 행동의 강직성으로서, 그것은 가문의 정통 신앙과 관계가 있다. 속세의 감각적인 매력에 대한 혐오(청교도적 특성)는 그가 화가로서 밟아온 경로에서 명료하게 드러나며, 청교도 교리의 특징인 엄격한 영적 수련은 그의 작품과 그의 성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나의 체계로서 여겨지는 것은 단지 순수 조형의 법칙, 즉 예술이 그에게서 요구한 그 필연적인 사실에 끊임없이 복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엄격한 수련은. 몬드리안이 겸허하게 종교적인 신앙으로 그의 작품에 전념한 것을 설명해주며, 또한 몬드리안이 1925년 되스부르그와의 불화로 인해 데 스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은, 올바른 길로부터의 이탈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몬드리안의 작품과 철학에서 가장 현저한 청교도적 양상은 인류의 복지라는 윤리적인 목적을 끊임없이 추구한 것이다. 그의 신조형주의 작품에서 형태가 부여된 웅대한 이상향은 천상의 예루살렘과 상통하는 바가 많다. 구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미래에 대한 그의 메시아적인 시각은 청교도 사상과 부합된다.  

 

2. 신지학적 세계관

   1889년 네덜란드에서는 신지학이 번성하고 그 회원이 10만에 이르렀다. 당시 몬드리안은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브리엘과 종교 및 신지학에 관에 오랫동안 논의해 왔으며 신지학에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성장기에서 단련된 엄격하고 금욕적인 캘비니즘에 대한 의문은 청년시대의 몬드리안에게 끝없는 회의와 고뇌을 갖게 했으며, 이러한 정신적인 번민은 인도철학과 신지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몬드리안은 신지학의 신플라톤 적이고 범신적인 관념을 통해 우주와 자연의 신비 및 인간존재의 신비에 대한 해결을 찾으려했으며, 신지학은 그가 철저하게 예술적 변혁을 수행하여 신 조형주의를 구축하기까지 정신적 지주와 이정표 역할을 한 사상이 되었다.

 

   신지학의 창시자인 블라바츠키(H.P.Blavatsky)부인은 러시아 태생의 귀족이었으나 티벹과 인도를 여행하며 정신주의자와 만남으로서 신비학에 이끌려 1875년 뉴욕에 신지학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회의 목적은 '생활의 규율을 바르게 하고 자연을 거부하는 일없이 이를 포용하고 우주법칙을 체득하는 일에 의하여 정신의 승리를 이끌어 신과의 합치를 이루는 것으로서, 예술은 그의 유도매체가 된다.'고 한다. 아울러 과거보다 미래지향을 강조하며 이것이 미래사상의 개척자가 되는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신지학은 동양의 신비주의나 신 플라톤주의에 기원을 가지며 자연의 비밀에 깊게 파고들어 단순한 학문적 지식이 아닌 직관에 의하여 그 본직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과 신성한 본질에 대한 통찰력은 개인에게 계시되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의 결과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나 신성한 본질과 그 신적인 본질 자체에 있는 힘의 작용으로부터 <현상적인보편>을 추출해 내려는 것이 신지학이다.

 

  몬드리안은 이러한 신지학의 이념을 통하여 '신비적인 지식'을 얻으려 노력하고, '신비적 영역'에 도달하고자 했는데 신지학과의 연관성에 대한 근거는 두권으로 구성된 그의 스케치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지학의 영향을 대변해 주는 그의 스케치북 1권에서는 바다를 주로 다루었고, 2권에서는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글들의 내용은 신지학에 관련된 신비적인 면과 이원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몬드리안은 우선 수직, 수평적인 요소를 남성과 여성의 이원적인 요소로 대립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원적 원리는 전 우주에 내재한 상징의 표현이며 대립적 긴장의 관계이다. 여기서 여성적(물질적 요소)와 남성적 요소(정신적 요소)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합일체가 되기 위해서 서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또한 몬드리안은 '예술가는 무성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자연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이원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은 자연을 초월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술가의 임무는 우주에 내재한 이원성을 표현하는 것이지, 자연현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술이 나아가야 할 길은 추상으로 귀결된다. 두 스케치북에서는 아직 수직, 수평선을 신조형주의 요소로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후에 그의 순수추상에 이르는 기본적 사상을 보여준다.

 

 3. 쉔마커스의 조형수학 이론    

   몬드리안이 완전한 추상에 접근할 무렵인 1916년 라렌에서 알게 된 쉔마커스라는 카톨릭 신부는 그의 조형이념에 결적적 영향을 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보편적인 힘에 대한 개념들에 관해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쉔마커스는 세계와 실재의 본성에 관한 그의 헤겔주의적 이론들을 두 저서에서 평술 했는데, 자신의 방법적인 기초와 신비적인 집중의 도움으로 우주의 구조와 의미에 대한 이해와 지식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몬드리안은 이 두권의 저서에서 크게 감화를 받았으며 쉔마커스의 이상과 사용언어를 인용하고 저술에서도 그의 표현이나 논평을 발췌 하였다. 특히 쉔마커스의 조형수학에서 이러한 점이 보여지는데. 쉔마커스는 <조형수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형수학이란 창조자의 관점에서 나온 진실하고도 체계적인 사고이다. ...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 속에 있는 리얼리티를 이성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구조로 바꾸는 법을 배움으로써, 자연의 구체적 특징 안에 있는 이와 같은 구조들을 재발견하고 조형적인 시각에 의해 자연의 통찰을 성취하는 것이다.

쉔마커스는 이러한 '조형수학' 안에서 자연의 상징적인 진리가 '정확성'에 이르게 되며, 근본적으로 자연이 갖고 있는 절대적 불변성 즉, 조형적 불변의 기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몬드리안이 받아들인 '정확성'은 그가 나타내고자 했던 <절대적 불변성>이고, 수학같은 정확한 직관적 수단이 되었다.

  쉔마커스와 몬드리안의 사고가 유사하고 부합되는 사실은 두 사람이 크리스트교, 헤겔, 신지학이라는 같은 경로를 밟아서 서로의 세계관에 도달한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후에 몬드리안은, 추상화로 향한 그의 예술을 정당화하는 수단을 쉔마커스의 대화와 글에서 발견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쉔마커스의 이론은 몬드리안의 화업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철학은 당시의 여러 경향들을 하나의 두드러진 형태인 데 슈틸로 경합시키는 촉매 작용을 하였으며, 몬드리안이 신조형주의를 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몬드리안의 작품 세계

1. 초기 작품 1898~1908

  19세기 네덜란드 자연주의에 확고한 뿌리를 두고 있는 초기 작품은 주로 Gein River가 중심이 되는 풍경 모티브가 주를 이룬다. 몬드리안은 밀레로 대표되는 프랑스 바르비죵 화파의 아류인 헤이그 파의 사실주의가 네덜란드 미술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때인 19세기 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사실주의적 요소와 낭만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다소 지방색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초기 작품들에서조차 낭만적인 효과들과 세부묘사들에 대한 일반적인 편향을 거부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율동적이며 납작한 형태들이 단순한 배열을 이루고 있다. 그는 이미 전체로서 인지된 그림 속에 내재하는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초기 작품들은 인습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고 개성적이며 본질적인 특성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1900년에 그린 <헤인 강가의 집>은 이러한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네덜란드 미술의 체제 내에서 발전을 보인시기는 1907년까지 계속된다. 상징주의의 영향, 그리고 은유적인 형상의 영향이 그의 초기 작품 속에 나타나 있다. 여전히 분위기를 자아내는 헤이그파 적인 색조를 띠고 있는 1907년의 <빨간구름>이 이 시기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한다. 몬드리안의 초기 그림들은 그가 세잔느의 작품을 알지 못하면서도 어떻게 세잔느가 추구했던 것과 같은 것- 현상의 우연성 이면에 있는 항구적인 것- 을 추구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세잔느와 달리 몬드리안은 신지론에 기초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보는 모든 특정한 사물, 즉 풍경이나 나무, 집이거나 간에 그 저변에는 본질이 내재해 있으며, 그 본질들은 외양이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조화상태에 있다고 믿는다. 미술가의 목표는 이 실재의 숨겨진 구조, 보편적 조화를 그림 속에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의 초기 그림들은 그가 실재로 볼 수 있었던 표면에서 그다지 깊이 내려가지 않은 곳에서 이러한 본질과 조화를 찾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모더니즘 1908~1911

  1907~8년 암스테르담의 전시에서 쇠라의 점묘주의와 마티스의 대담한 색채의 야수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는 당시 네덜란드의 아방가르드 예술 집단이 모여있던 바닷가의 Domburg항구를 자주 방문하여 교분을 갖는다. 거기에서 그는 물질에서 정신으로의 진보적 전개라는 논리를 지는 신비스러운 신지학에 심취하게 된다. 이 신지학은 몬드리안의 예술 이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된다.

  1908년에 제작된 <울레 부근의 숲>은 선과 색채가 더욱 강조되는 새로운 방향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울레 부근의 숲>에서 리듬감 있는 선들과 색채는 특히 야수파와 같은 당시 다른 경향들의 작품들 뿐 아니라, 뭉크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몬드리안의 작품은 이러한 경향을 띠고 있으면서도 동료들과의 작품과는 달랐는데 그 차이점은 초기부터 그의 작품의 특성을 주도해온 속성들-불안정한 자연의 형상들 너머, 단순한 구성의 법칙에 따르는 문명한 실루엣을 선택하게 하는 자연에 대한 시각-에 있었다.

  몬드리안의 이와 같은 새로운 발전, 지평의 확장은 아주 초창기에 선호하던 '풍차'와 '나무들'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통해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다. 1908년의 작품 <햇빛에 비친 풍차>를 같은 주제로 그린 이전의 그림과 비교하면 색채를 단순화 시키고 순화시킨 것 뿐 아니라 중앙부분 교차하는 수직, 수평선의 붓자국을 사용한 단호한 형식상의 구조가 눈에 띤다. 또한 1911년의 <빨간풍차>와 비교한다면 몬드리안의 작품전개 방향이 매우 분명히 드러난다. 나중 작품은 형태들의 감축에 원초적으로 기초하고 있으며, 색채들의 단순한 대조에 의해 강화되어 있는 긴장감과 보편적 특징으로 구분된다. 1908년 작품 <붉은 나무>는 밝은 야수파적인 색채로 그려진 표면적인 그림인데, 이 그림에서도 역시 자연의 색채 범위는 비극과 평정사이의 균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빨강과 파랑의 대조로 축약된다.  여기서 우리는 나무와 그 주변에서 돋아나고 있는 풀들의 생명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 후의 나무 그림에서는, 가지들이 그림가장자리로 퍼지면서 나무를 그 공간 속에 '가두려' 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나무와 나무 자체의 생명이 주제가 아니라 단지 나무와 다른 모든 것과의 연관성이 주제가 되고 있다. 나무의 활동성은 우주적 운동의 일부로서 나타내고 있으며, 이 운동은 나무에서 부분들이 갖는 특성을 제거하여 사실상 추상화시킴으로써 표현되고 있다. 나무의 3차원적 형태가 완전히 2차원적인 조형언어로 전환되어 있는 것이다.

 

  몬드리안이 추구한 이러한 우주적 조화는, 다른 나무 그림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그림에서 나무의 줄기와 가지들은 직선과 곡선이 되었으며, 가지는 운동이고 그 사이의 공간들은 그 반대가 된다. 가지들은 마치 몬드리안의 초기 작품에서 모래 언덕이 바다에 버티면서 힘의 균형된 대립을 보여준 것처럼, 공간과 대비되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는 주변 공간에 비해 너무 강해 보이는 풍차의 돛이라든가 바다의 수면을 너무 무겁게 억누르고 있는 듯한 수평선 등과 같이 사물에서 균형이 결여된 것에 대해 대단히 예민했다.

 

3. 입체파 1911~1914

  1911년 10월 암스테르담 전시에서 세잔느와 피카소와 브라크의 초기 큐비즘과 만나 영향을 받는다. 그는 세잔느의 환원과 공간의 분절화를 포용하며 평면들 사이의 변이를 흐리고자 붓자국을 사용한다. 그는 결국 파리로 이주하여 추상을 향한 결정적인 전단계인 큐비즘을 연구하게 된다. 이 시기에 나무시리즈가 시작된다. 건축적인 골격 형식의 수평 수직의 격자와 황토색과 회색을 주조로 하는 초기 입체파의 색들은 점차로 파스텔 핑크, 노랑, 파랑으로 대치된다. 몬드리안은 1911년에 파리로 가서 후기 단계에 있는 큐비즘을 알게 되고 그것에 심취하였다. 큐비즘은 비록 매우 다른 방법이긴 하지만 실재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방법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을 확신케 해주었다. 몬드리안이 엄격한 단순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단계가 된 입체파로의 추이는 외적인 양식상의 변화가 아니라 논리적인 내적 발전에서 나온 것으로, 그 바탕은 몬드리안의 작품 속에 내재해 있었다. 1942년의 자전적인 글에서 몬드리안은 자신이 피카소와 레제의 작품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했다. 1912년에 파리로 이주한 직후 그의 그림들은 새로운 경향의 특징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1912년에 제작된 <생강단지가 있는 정물>2점이 있다. 먼저 그린 그림에서는 대상들이 여전히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데 비해, 두 번째의 그림에서는 그것들의 회화적 기호가 구성되고 감축되어 조형적인 조화 속에서만 그 역할이 주목되며 대상의 실제 모습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더욱이 이 두 번째 그림에서는 그 당시 입체파 작품의 일반적인 추세로서 타원 형식의 경향을 띠는 구성적인 통일성에 색채가 종속되어 있다. 그와 같은 경향은 나무를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에서도 보여진다. 여기서 나무라는 주제는 단지 제목의 출처가 될 뿐이며, 하나의 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인 측면은 이러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구조 즉, 자연의 임의성과 무작위성을 억제하는 방법론이다. 색채를 희생시키면서 까지 형태와 구조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몬드리안이 항상 추구한 것은 그의 조형언어와 현상적인 실제 형태들간의 관계이다. 그의 그림에서 대상의 역할은 입체파 화가들보다 덜 본질적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구성의 균형이며, 작품의 근거가 된 주제와는 별도로 캔버스 위에 창조된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세계의 독자적인 타당성이다. 그는 입체주의가 제시해준 수학적으로 엄격하고 매우 정신적인 화법만을 고수했다. 그러나 종합적 큐비즘 또는 콜라쥬 큐비즘이 발전되어 실재의 사물들이 그림에 부착되는 것을 보고서는 그는 이러한 방법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회화에서 실재의 사물을 더 이상 묘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런 것들이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또 느낌이란 순수 실재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일 이년 후에는 러시아 화가들도 이와 동일한 사고 방식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추상화란 조화와 균형을 향한 길이었다. 몬드리안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보편적 조화와 균형을 향한 길이었는데, 그는 보편적 이미지를 위해 특정한 이미지를 버림으로써만이 그러한 조화와 균형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추상적 형태에 대하여조차도, 그는 자신이 아직도 무언가를 너무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신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이 들어설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몬드리안 또한 신비주의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고 전 생애동안 신지학회의 회원으로 있었다.

 

  그가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보편적인 원칙들을 엄격히 따르는 것이었다. 조형언어에서도 모든 다양성을 소수의 기호들로 축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자연의 파편들을 엄격한 형식 언어로 전환시킨다는 문제제기일 뿐 아니라, 이 언어 자체는 보다 더 순수해지고 더 절제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곡선들과 무디거나 뽀족한 각도들이 사라지고, 몇몇 사선들로 인해 끊어진 수직선과 수평선의 교차만이 남게 되었다. 또한 서서히 색채 범위도 줄이고, 단순화시켰다. 중간 색조들이 점차적으로 사라지면서, 밝은 파랑, 분홍, 황갈색에 가까운 노랑의 3원색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서도 형태가 색채보다 우선했다. 1914년 이후,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입체파적 양식의 몬드리안 후기 작품들은 거의 모드 색채가 배제되어 있다.  

 

4. 추상을 향해서 1914~1917

  1914년 아버지의 병환으로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그후 1차 대전을 맞게 된다. 전쟁기간 동안에 몬드리안은 암스테르담 근처의 라렌이란 곳에서 건축적인 구조의 주제를 비물질화 시키는 작업에 주력한다. 교회 Facade(파사드)를 모티브로 한 드로잉의 오랜 연구 끝에 최초의 추상화인「흑과 백의 구성(Composition in Black and White)」을 탄생시킨다. 초기의 작품에는 스케치와의 연관성이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반해, 후기의 작품들, 특히 1917년의 그림은 기점이 되는 스케치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연상시키는 흔적을 남겨놓지 않고 있다. 본질적인 것, 즉 '리얼리티의 참모습'을 추구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인상들을 모든 우연적인 것에서 해방시켜 단지 자연의 보편적인 기억만이 남게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는 잠정적인 절정에 이르게 됨과 동시에 입체파적 방법론을 통해 추구해온 과정에 종지부를 찍게되었다. 이때 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나무프레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나는 액자보다도 캔버스가 앞으로 조금 나오게 함으로써 , 액자 자체가 그림을 불러오게끔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림에 사실적인 존재감을 부여했다." 이런 개념은 「선의 구성 (Composition in Line)」에서 최초의 완벽한 실현을 보게된다. 즉 자연의 승화를 독립적인 추상 오브제로의 이동을 보여준다.

 

5. 데 스틸 시기 1917-1919

  1917년 이후로 몬드리안은 더 이상 자연의 우연적인 단편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으며,그 당시에 이미 엄격함과 보편화를 통해 자연을 사실상 완전한 평형상태로 표현했다. 그는 이제 그가 찾고 있던 절대적인 조화가 더 이상 존재하는 대상으로부터는 끌어낼 수 없는 추상적인 방식,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객관적인 방식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원칙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10년후에 몬드리안은 그 새로운 예술의 초창기를 회고하며 쓴 글에서, "신조형주의 그림은 건축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물들의 자연적인 추세를 추상화함으로써 우주적인 평형상태를 표현하기에 이르렀다고 언급했다. 순수추상에 이른 몬드리안은 단지 색채 평면만을 사용한다. 이 새로운 양식의 기초는 <데 스틸>지가 발행된 시기인 1917년에 마련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몬드리안은 그가 적용한 모든 회화적 수단의 완벽한 구사를 통해 새로운 구성의 원칙들을 발전 시켰다. 그는 1918년의 작품을 계기로, 선과 색채를 균형잡힌 전체로 통합하기까지 어떤 작품들에서는 색채로, 또 다른 작품에서는 직선구조로 실험을 했다.

 

  전쟁기간 동안 그는 라렌에서 되스부르그와 함께. '사실성의 진정한 시각' 이란 모토아래 데 스틸(De Stijl/The Style)협회를 형성한다. 러시아 절대주의자들은 네델란드의 화가이자 이론가인 테오 반 되스버그(Theo van Doesberg)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와 몬드리안은 1917에 '데 스틸' (De Stijl)이라는 운동의 공동 창시자가 되었다. 출판물의 이름이기도 한 이 운동에는 화가 반 데어 렉크 (van der Leck), 조각가 죠르쥬 방통절루, 건축가 아우트 (J.P.Oud), 로브 반 트호프(Rob van t'Hoff)와 후일의 게르트 리에트펠트(Gerrit Rietveld)등이 참가했다. 이 운동의 양식은 '신조형주의' (Neo-Plasticism)라고 불리었는데, 신조형주의는 사물의 본질적 요소는 수평선과 수직선, 원색과 같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즉, 만약 우리가 무엇인가를 충분히 분석하고 단순화 시키면 그것의 본질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데 스틸 운동의 미학과 강령의 발전과정은 세 단계로 나눠질 수 있다. 1916~1921년에 이르는 단계는 형성기로서 외부의 참여 외에는 주로 네덜란드가 중심이 되었다. 1921~1925년까지는 성숙기이며 국제적으로 이 운동이 보급된 시기이다. 반면에 1925~1931년까지는 변화와 궁극적인 붕괴가 일어난 시기로 봐야한다. 몬드리안이 데 스틸의 전개과정에 대하여 갖는 위치는 각 단계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1914년 라렌에서  <장차의 운동(신조형주의)>과 쉔마커스의 사상을 최초로 접합시킨 것은 이미 신지학적인 경향에 몰입해 있던 몬드리안 이었던 것이다. 또한 1916년 라이덴에서 반 데 렉-그는 몬드리안과 되스부르그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다.-와의 사이에 풍부한 교류를 이룩한 것도 몬드리안 이었다. 몬드리안은 쉔마커스에 의해 미리 정해진 직각의 형식을, 되스부르그가 '독단적으로' 변형시켰다는 것 때문에 1925년 데 스틸과도 되스브르그와도 절연하게 된다.  

 

6. 신조형주의 창시 1920

  전쟁이 끝나고 몬드리안은 1919년 6월에 파리로 되돌아온다. 그는 그해 11월에 새 작업실을 마련하여. 색면판넬 만을 걸어놓은 싸이트적 성격의 스튜디오를 등장시킨다. 그는 1920년에 공식적인 서명형식으로써 신조형주의를 명명한다. 이 형식은 「노랑. 빨강. 검정 . 하늘색. 회색의 구성 (Composition with Ye11ow, Red. Black. Blue and Grey)」작품 내에서 보여지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조형은 색채와 비색채에 최대한의 강도와 가치를 갖는다."

 

  그는 새로운 조형방법에 숙달됨에 따라, 그가 항상 추구하고 있었던 조화가 주관적인 임의성, 혹은 우연한 자연적 사실과 무관하게 표현될 수 있다고 느꼈다. 몬드리안은 1920년과 1922년 사이에 창조된 일련의 작품들에서 이와 같은 완숙함을 성취했다. 그는 1920년 출판된 불어판 <신조형주의>를 통해 새로운 양식의 원칙들을 소개했다. 이때부터 고독하고 조용하며, 종종 가난에 시달리며 고립된 채 외적인 사건들로 인해 방해받지 않고 신조형주의에 기초한 작업을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완벽한 조화의 모델인, 수직, 수평선과 3원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몬드리안은 1919년부터 1938까지의 파리체류기간을 모두 이 양식을 완성하는데 보냈다. 20년대와 30년대의 몬드리안의 그림은 사선이나 곡선을 폐기하였다. 이는 그것들이 관상자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는' 반면 수평선과 수직선을 관상자와 캔버스 사이의 접속을 축소시키는 장애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직선과 원색은 평등성과 균형을 갖춘 명료하고 밝으며 힘찬 구조를 만들어냈는데, 몬드리안의 그림은 그의 자연에 대한 견해로부터 전우주에 대한 관념화된 견해로까지 발전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은 통일성, 실천성, 아름다움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의 철학에서는 개인은 보편적인 삶과 문화 속에 용해되는 것이었다.  

 

 * 신조형주의 이론

  조형주의의 어원은 네덜란드어인 'nieuwe beelding'으로서 쉔마커스의 <새로운 세계상>으로부터 차용한 표현이다. 몬드리안은 예술의 모든 곳에서, 그리고 근본적으로 같다고 할지라도 서로 대립되어 반대하는 두 가지의 인간성향이 있다는 예술의 이원성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구상예술과 비구상 예술, 개인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특정형태와 중립적인 형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변하는 것과 불변하는 것 등의 이원적 대립을 말한다. 이러한 이원성은 신지학의 이원적이 이론에 근거를 둔 이념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몬드리안의 말은 단순한 이원적인 대립을 부정하면서 예술의 본질과 비구상예술이 나오게 된 타당성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구상예술은 과거의 구상예술의 산물이며, 비구상예술은 오늘날의 구상예술의 산물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예술의 단일성이 유지된다. 만약 비구상예술이 구상예술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인간의 이원성의 두 가지 요소들이 변화해 왔을 뿐 아니라 상호균형과 통일성을 향해 접근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것을 '조형예술에 있어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형예술의 발전은 예술에서 그 자체를 표명해 온 이원성이 단지 상대적이며 일시적인 것임을 알려주다. 예술은 그 근원으로부터 잘 살펴보면, 외부로부터 보여진 예술적 표현은 '연장의 과정'이 아니라 '강화의 과정'이고, 내부로부터 보여진 표현은 성장임을 알려준다. 강화를 통해 우리는 성공적으로 좀 더 심오한 평면을 창조해 내고, 확장은 항상 똑같은 평면 위에 남게 된다. 두 개는 대립하여 반대한다. 이 두 가지는 길이(혹은 넓이)와 깊이가 그렇듯이 서로 직각을 이룬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일시적 대립이다. ... 예술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경향 즉, 구상적인 것이 그렇게 절대적이라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본질상 보편적이며 예술의 표현은 주관적인 시각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몬드리안이 제시한 예술의 본질에 대한 설명과 비구상예술의 출현 이유는 예술발전상 피할 수 없는 역사적인 해결점인 동시에 비구상예술 자체의 존재론적인 실현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역사주의적인 관점에서 과거의 예술이 비구상예술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는 것과 또한 본질적인 관심에서 역사의 과정의 추진력이 존재론적이므로 비구상예술이 개체 발생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 신 조형주의 원칙
     1) 조형 수단은 삼원색, 무채색에 의한 평면 또는 사각형이어야 한다. 건축에 있어서 공간이 무채색에 해당되고 재질은 색채로 간주된다.

     2) 조형수단의 등가성이 필요하다. 크기와 색채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가치를 가진다. 균형은 일반적으로 무채색의 큰 평면과 색채 또는 재질의 작은 평면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3) 구성에 있어서 조형수단 가운데 대립적 요소의 이원성이 요구된다.

     4) 영속적인 균형은 대립에 의하여 달성되고 풍요한 대립을 표시한다. 즉, 직각위에 교차하는 직선(조형수단의 제한)에 의해 표현된다.

     5) 조형수단을 중성화하고 없어지는 균형은 조형수단을 차지하고 있는 군형에 의해 달성되고, 그것은 생생한 리듬을 창조한다.

     6) 모든 대칭은 배제되어야 한다.    

 

  * 신조형주의와 형태
     자연에 내재하는 관계성은 형태나 색채로 나타나는 그 자체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이 자연형태의 모방적 조형은 과거의 예술가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이와 같은 과거의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수 세기간 회화는 자연형태와 자연색과의 관계 만에 의한 조형주의에 도달 할 때까지 조형적으로 표현해 왔으나, 현재는 구성 그 자체가 표현이며 이미지 이다.

 

  * 신조형주의와 색채
     이는 내재된 조형표현이지만 신조형주의는 역시 회화이다. 그 표현수단은 회화의 표면과 등질대로의 평면에 있어서 순수하고도 명확한 색채인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색채는 평탄한 표면에 화면 그대로 남는다. 그것은 형태의 조정을 먼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제약에 의하여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형태학적 조형에 있어서 보다 훨씬 강화한 것이다. 

 

7. 몬드리안과 음악

  몬드리안은 1920년부터 음악, 특히 미국 재즈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음악으로부터의 영감은 몬드리안이 그 자신의 구성과는 달리 직관적으로 인식되는 균형을 발견하게 한다. 몬드리안은 그의 전 경력을 통해서, 그의 예술이 기하학의 계산에 근거했다고 널리 펴져 있는 오해를 고치려 노력해왔다. 그의 그림들은 오히려 고도로 충동적인 작업과정의 깊이를 숙고한 결과였으며, 화학적 해결들을 위한 세련화의 작업 과정들은 풍부한 표면들과 복합적인 널리 숨겨져 있다. 말년의 몬드리안은 당시 기하학적 추상에 새로운 정신을 심어주는 자양분이 된다. 2차대전 중 뉴욕으로 망명한 그는 이 대도시의 움직임에 매료된다. 흰 바탕에 원색의 띠가 교차되던 과거의 작품 경향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그는 말년에 이르러 공간의 역동적 분할로써 공간에 깊이를 주는 움직이는듯한 충동적 구성을 추구한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의 댄스리듬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이 찬란한 뉴욕에 대한 느낌을 더욱 강조하면서 그의 회화를 선면의 구속에서 해방시킨다.     

 

-결론-

  몬드리안의 회화세계는 곧고 일관된 것이 인상적이다. 오랜 세월 계속 된 무관심과 고독과 가난의 역경 속에서도 그는 결코 그의 예술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그의 신념을 굽히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에게는 물질적인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데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희생 정신을 요한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의 이상에 바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새로운 사회가 언젠가는 모든 분야에서 성취해야할 것을 형상화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 결국 새로운 인간이 진정한 자기-평형을 이루는 등가적존재로서 자연이면서 동시에 비자연-를 회복함으로써 자연을 재창조 한다면, 그때 인간이 지상의 천국을 되찾게 될 것이다! (<데스틸>,Ⅲ, 77).
    
  이러한 목적 때문에 몬드리안은 전 생애와 화가로서의 모든 과정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것을 찾는데 바쳤다. 몬드리안의 생애는 이례적인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 분야에서도 특별한 것이다. 몬드리안은 회화에 대한 그 당시의 기존관념들을 훨씬 초월했다. 그는 회화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했고, 자신의 그림들을 통해 그 새로운 예술의 기능,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몬드리안은 조국의 청교도적 환경에서 시작하여 예술과 조형수단의 순화를 주장했고, 성취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그의 예술은 시각적인 계시의 힘으로 관람자 즉. 인류를 순화시킬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인류를 계몽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몬드리안의 예술이 제기하고 있는 목표이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상아탑 속에서 살았던 것 처럼 보이지만, 그 상아탑이 이제는 모든 세대에게 확고한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등대구실을 하게 되었다. 몬드리안이 50여년 동안의 작품활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듯이, 그의 예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창조자의 메시지를 밝히고 있는 횃불이다. "미래를 예비한다는 매우 아름다운 임무가 예술에 기대되는 것이다."(<까예  다르트 Cahiers d'art>. 1931년 , 제 6권, 제 1호. 43쪽)

 추상의 선구자인 몬드리안은 현대 미술에 있어 독창적인 순수성과 명료함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였다. 몬드리안은 조형의 기본요소인 선과 색으로 엄격한고 면밀한 계획 아래 새로운 조형공간을 만들어 절대적 실체를 이룩한 유일한 존재이다. 이러한 몬드리안의 조형이념에 대한 신념과 선구자로서의 열정은 현대미술 전 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후대에도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Works Cited

한스 야페. Mondrian. 김금미 역. 서울 : 중앙일보사, 1991.
허경. 몬드리안 회화의 추상형성에 관한 연구 : 형상에서 추상에로. 서울 : 홍익대출판사, 1988.
장 뤽 다발. 추상미술의 역사. 홍승혜 역. 미진사, 1994.
세계미술대사전Ⅱ. 한국미술연감사. 1992. pp. 563~565.
허버트 리드. 현대미술의 원리. 김윤수 역. 열화당, 1996. pp. 64~81.
케네스 프램프턴. <데스틸>. 니코스 스텐고스 편. 현대미술의 개념. 성완경, 김안례 역. 문예출판사, 1996. pp. 215~242.

인터넷 자료발췌.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캔버스 매는 방법 2010.06.27 67598
공지 캔버스 크기 2008.02.08 106402
42 2017년 제54차 한국미술협회 임원. 전국지회(부)장 회의 및 세미나 file 2017.06.11 54
41 작품과 지문 2012.03.19 20127
40 2011년 김영빈 개인전 - Emotion 展 - 서문 2011.12.08 26529
39 철학과 도시건축 - 데카르트와 비트겐슈타인 / 포스트모던 건축의 초(超)문화성 2009.12.09 41032
38 모던의 종언? /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 그로이스 / 벨쉬 / 젠크스 / 리요타르 / 푸코 / 자연의 복귀 2009.12.09 37445
37 모던에 대한 보수적 옹호와 비판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한스 제들마이어 / 아놀드 겔렌 2009.12.09 31358
36 프란츠 코페 / Arthuv Danto 2009.12.08 32030
35 아도르노와 귄터 안더스 2009.12.07 33461
34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2009.12.07 45487
33 콘라드 피들러 : 직관으로서의 예술 2009.12.02 33306
32 쇼펜하우어에서 니체로 Ⅱ - 니체―‘도취’로서의 예술 2009.12.01 32949
31 쇼펜하우어에서 니체로Ⅰ - 쇼펜하우어―‘마취’로서의 예술 2009.12.01 32998
30 모던의 선취로서 낭만주의 - 헤겔, 슐레겔, 마르쿠바르트, 졸거, 키에르케고르 2009.11.30 34123
29 모더니즘의 미학 (2) 2009.11.26 32430
28 모더니즘의 미학 (1) 2009.11.26 34020
27 재미있는 그림 읽기 2009.05.21 55979
26 창조적 인간과 기능적 인간 2009.03.12 38391
25 '앎'에 대하여... 2009.03.05 33414
24 피카소의 어록~ 2008.06.28 53448
23 보들레르 미술비평과 시 2008.05.19 48193
22 국립현대미술관 제4전시실 '한국현대미술' (2008년 4월) 2008.04.21 43684
21 국립현대미술관 제3전시실 '인간·존재','자연·원형' (2008년 4월) 2008.04.21 40867
20 현대미술비평과 포스트모더니즘 ; 다원주의(Pluralism) 미술론 2008.04.04 103041
19 케테 콜비츠 (K the Kollwitz) 의 논문 2008.03.05 42533
» 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의 조형이념 2008.03.05 50655
17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의 예술세계 2008.03.03 47665
16 "기호학"에 대한 석사논문 2008.03.03 48051
15 데 스틸 (De Stijl) 2008.03.03 56098
14 개념미술 (Conceptual Art) 2008.03.01 45503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