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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c 09, 2009
  • 41047

 예로부터 건축과 철학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일찍이 아리스트텔레스는 철학자를 건축가에 비유하였고, 중세인들은 신의 세계 창조를 즐겨 건축가의 작업으로 묘사하였다. 근대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는 철학적 사유를 건축에 비유하였고, 독일 관념론의 선구자인 칸트는 “순수이성 철학의 본래 이념은 건축적”이라고 말하였다. 비록 건축이라는 장를 예술발전의 낮은 단계에 놓았지만, 근대철학의 정점인 헤겔철학은 그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에서 서구의 형이상학 전체가 ‘건축에의 의지’ 위에 놓여 있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실제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형이상학은 모든 지식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 위에 체계적으로 쌓아올리려는 ‘건축에의 의지’ 위에 서 있었다. 건축, 그것은 서구 형이상학을 지탱해 온 사유의 이미지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이 사유의 이미지가 붕괴한다. 수학에서는 괴델이 자기 완결적인 건축에의 의지가 수학에서조차 불가능함을 증명해 버렸다. 철학에서는 베트겐슈타인이 이상언어로 세계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리려던 꿈이 그릇된 망상임을 깨닫고 철저한 건축적 원리로 쌓아올렸던 자신의 초기철학을 부정한다. 근대적 ‘건축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던의 철학은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등장하기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사상적 선구로 여겨지는 니체마저도 건축의 은유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이란 “움직이는 토대 위에, 흐르는 물 위에 삶과 사유의 구조물을 건축하는 건축의 천재”였다. 한 마디로 건축의 바닥을 이루는 기초, 즉 철학적 정초주의(Fundamentalismus)는 붕괴하였어도, 움직이는 토대 위에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인간의 천재성은 살아 남은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모던의 사상들은 니체가 말한 그 건축물을 닮았다. 움직이는 지각, 흐르는 강물 위에서 모빌처럼 움직이는 건축물들.

 

 데카르트와 비트겐슈타인

 건축이 종종 철학의 은유로 사용되어 왔지만 정작 철학에서 도시건축에 관한 언급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그 중에 나는 딱 두 가지를 알고 있다. 하나는 데카르트의 언급이다.

 

“오직 하나의 건축가가 기도하여서 성취한 건물은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른 목적으로 만든 낡은 벽들을 고쳐가면서 지은 건물보다 훨씬 아름답고 더 잘 정돈되어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조그만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고대 도시들은 한 사람의 기술자가 자기의 환상대로 그린 대도시에 비하여 훨씬 덜 정돈되어 있다. 한편으로 한 기술자에 의해 구상된 도시에서 그 각각의 건물들을 따로 떼어서 생각해 볼 때에도, 만약에 우리가 그 건물들이 어떻게 배치되었으며, 또 크고 작은 집들과 그것들이 꼬불꼬불하고 부정형한 거리를 어떻게 이루고 있는가를 볼 때에, 순차적으로 여러 사람에 의해 발달된 도시보다도 더 기술적이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제2부)

 

 한 마디로 여러 건축가의 생각이 모여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고대도시보다 단 한 사람의 계획에 의해 체계적으로 건설된 근대도시가 더 질서정연하고, 때문에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시건축을 바라보는 데카르트의 취향을 볼 수 있다.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제시한 사유의 이미지는 이렇게 한 사람의 건축가에 의해 통일적, 체계적으로 지어진 질서정연한 계획도시를 닮았다. 이 통일성, 체계성, 인공성이 바로 근대적 인식론적 이상이자 동시에 도시건축을 바라보는 근대의 미적 취향이었다. 재미있게도 이 데카르트의 취향이 수백년 후에 전통과의 과격한 단절을 주장하는 ‘근대주의(=모더니즘)’라는 형태로 반복된다. 가령 ‘파리의 구(舊) 시가지를 밀어버리자’고 하였던 르 코르뷔지에를 생각해 보라.

 

 도시건축을 사유의 이미지로 제시한 또 한 사람의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러니까 <트락타투스> 시절에 그가 꿈꾼 이상언어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인공언어였다. 그러나 그의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적 탐구>에서 그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언어관을 제시한다.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로 간주될 수 있다. 즉, 골목길들과 광장들, 오래된 집들과 새집들, 그리고 상이한 시기에 증축된 부분을 가진 집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미로.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곧고 규칙적인 거리들과 획일적인 집들을 가진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18)

 

 도시건축에 관한 데카르트의 언급이 실은 그의 철학적 합리주의의 이미지였듯이, 오래된 도시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 역시 그의 후기 철학의 은유이다. 위의 언급 속에서 ‘미로’란 우리의 혼란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일상언어를 가리키고, 파리의 라데팡스나 서울의 강남과 같은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는 과학적 필에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형식언어, 즉 수학, 화학, 물리학 등의 인공언어를 가리킨다. 세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혼란스러운 일상언어를 없애고 그 자리에 질서정연한 인공언어를 만들려고 하였던 르 코르뷔지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제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근대를 특징지었던 이 언어관을 폐기하고 일상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철학적 전회는 동시에 건축을 바라보는 그의 미적 취향의 전회이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이 철학적 전회 후에 자신이 과거에 지은 건물에 혹평을 한 데서 잘 드러난다.

 

 초(超)문화성

 최근 철학에서 논의되는 도시건축은 대개 이 이미지를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가령 데카르트가 말하는 근대도시,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만들어내려 한 이상언어는 한 마디로 ‘명석 판명함’이라는 근대 합리주의 인식이상의 표현이다. 이 인식이상 속에서는 개별 요소들이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어 명확한 동일성을 가지면서 전체를 관장하는 한 건축가의 계획 아래 질서정연하게 배열된다. 여기에는 타자의 시각이 끼여들 여지가 없고, 전체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요소들도 없다. 이 근대적 인식이상이 또한 근대의 ‘문화’ 개념이었다. 실제로 근대 민족국가 시대에 ‘문화’는 한 민족, 한 언어의 정체성으로 규정되고, 밖에서 들어온 요소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흐리는 불순물 내지 이물질로 여겨져 간단히 배제되곤 하였다. 그리하여 근대의 ‘문화’ 개념은 한 문화의 안쪽으로는 강한 동질성을 요구하면서 밖으로는 배타성을 띠고 있었다. 그 예를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심한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오래된 도시’를 사유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면 문화에 대해 이와는 좀 다른 관념을 갖게 된다. 한 마디로 문화의 순수성, 동질성에 대한 강박을 가진 폐쇄적인 단일문화가 아닌 다양한 요소들이 공존하며 다른 이질적 요소들에 개방된 다문화(Multikultur)의 개념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도시 속에는 옛 도심이 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사후에 증축된 구역이 있으며, 외곽에는 계획에 따라 지어진 근대주의 건축의 구역이 있다. 여러 문화의 층위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 도시의 삶은 더 이상 과거 민족국가 시대처럼 단일문화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이미 다양한 문화의 층위가 혼재한다. 포스트모던은 하나의 단일한 언어로 도시 전체를 획일화하는 데에서 벗어나 이렇게 이미 다양하게 분화하여 공존하는 여러 문화의 층위들을 고려한 새로운 도시건축을 지향한다.

 

 독일의 미학자 볼프강 벨쉬는 이 다문화의 공존을 ‘초(超)문화성’이라 특징지으며, 이것이 현대건축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밝힌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가령 페이(I.M.Pei)가 보스턴에 세운 <존 행콕 보험사옥(John Hancock Insurance Company)>(1966~1976)은 미국식 마천루에 아시아적 취향을 가미한 복합언어를 사용한 건물인데, 각자 다른 생활방식을 가진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고루 상찬(賞讚)을 받는다고 한다. 두 번째는 재미있게도 르 코르뷔지에의 <카펜터 시각예술센터(Carpenter Center for Visual Arts)>(1963)이다. 하버드대학교 주변에 세워진 이 건물은 하버드대학교의 다른 건물들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전형적인 르 코르뷔지에의 양식을 고집하며 서 있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 건물이 다른 건물과 대조를 이루면서 모종의 초문화적 분위기를 풍기고, 바로 이 일탈이 그러지 않았으면 지루하였을 대학의 건물들에 생기를 준다는 것이다. 세 번째 예는 파리에 있는 장 누벨(J.Nouvel)의 <아랍세계연구소>(1987)이다. 이 건물 벽에 달린 수많은 렌즈들은 적정량의 일광을 건물 안에 받아들이도록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조리개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렌즈들은 하이테크의 산물로 읽히는 동시에 아랍의 전통적 문양으로도 읽힌다. 한 마디로 페이의 작품은 한 건축물 안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은 다른 건축물과의 앙상블 속에서, 장 누벨의 건물은 동일한 요소의 이중적 독해 속에서 각각 초문화성을 독특한 방식으로 구현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초문화성의 원칙이 도시건축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지를 밝힌다. 이제까지 포스트모던에 관한 논의가 개별 건축물으로 이루어져 왔고, 그것을 도시건축에까지 확장시키는 논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에 그의 논의는 아직 추상성을 벗지 못한다. 어쨌든 그에 의하면 미래의 도시는 “이행의 가능성을 허용하고, 다의성을 포함하며 통과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미래의 도시는 자기완결적이며 폐쇄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소통의 망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되어야 한다.

 

 즉, 토박이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도 정체성을 주어야 한다. 근대의 도시건축에서는 토박이들은 그 안에서 완전한 정체성을 갖는 반면 타향인들은 그곳을 고향으로 느끼지 못하였다면 미래의 도시건축은 이 구별을 없앤다는 것이다. 이 개방성이 도시 고유의 얼굴을 지워버릴지 모른다고 특정한 고향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시도는 역사적 퇴행일 뿐이다. 물론 미래 도시의 초문화적 정체성에도 코스모폴리탄적인 요소와 함께 지역적 요소가 공존하기에 미래에도 도시건축가는 여전히 지역적 정체성의 족쇄 속에 집어넣어 획일적인 정체성을 창출하지 말고 끊임없이 다른 정체성의 내용과 형식에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우리의 근대

 이것이 최근의 철학에서 도시건축을 논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이 논의가 기호학과 언어철학에서 도시건축에 접근하는 방식이라면 여기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생태론적 통찰에서 얻어진 시각으로 도시건축과 자연의 관계를 논하는 방식이다. 물론 그 어느 것이나 우리 사회와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서구에서 도시건축을 논하는 시각이므로 그것을 곧바로 우리 현실에 대입하여 우리의 도시를 읽을 수는 없다. 우리의 도시를 읽는 데에는 좀 더 면밀한 경험적 관찰을 통한 패러다임의 수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철학만의 힘으로는 어렵고 철학과 건축학 사이의 학제간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우리의 수도는 지난 40여 년간 우리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근대화의 역사를 기록한 텍스트이다. 한국에서 ‘근대성’의 개념을 얻으려면 바로 이 텍스트를 읽어내야 한다. 구시가를 흔적도 없이 밀어버린 서울은 한국적 근대의 반(反)전통주의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똑같은 형태와 색깔로 도배가 된 얼굴 없는 도시의 획일성은 근대의 기능주의적 극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극단적 ‘근대’는 근대건축의 유일한 장점조차 갖지 못한 듯하다. 즉,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신도시 서울에는 심지어 계획성조차 없어 보인다. 바로 이것이 한국적 ‘근대’의 얼굴이다.

 

<진중권 교수의 강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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