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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c 07, 2009
  • 33493

아도르노와 아방가르드 예술

 1. 재현의 파괴

“예술의 인식은 담론적 인식이 아니며, 그것의 진리는 대상의 반영이 아니다.” 여기에서 아도르노는 수천년간 서구를 지배했던 예술에 관한 대이론을 전복하고 있다. 현실 속의 대상을 모사하는 것을 포기한 현대 아방가르드 예술은 그것을 설명해 줄 적절한 이론적 틀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아도르노로 하여금 전통적인 예술관념, 즉 모방, 재현, 반영으로서의 예술관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인식적 성격을 부정했던 칸트와 달리 아도르노는 진리미학을 포기하고 형식미학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새로운 진리미학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2. 예술의 진리

“담론적 인식에서 참은 감추어져 있지 않으나 담론적 인식은 참을 가질 수 없고, 예술이라는 인식은 참을 갖고 있으나 거기에 통약불가능한 것으로 갖고 있다.” 여기서 아도르노는 근대의 진리미학과 다른 방식으로 예술적 진리를 정의하고 있다. 아도르노에게도 예술은 여전히 인식적 가치를 가진 상징형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개념적, 합리적, 담론적 인식의 물질적, 감각적 표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아도르노에게 예술작품은 대상의 단순한 모방이나 개념적 인식의 일러스트레이션이나 미학외적 진리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3. 미적 주체성의 해체

예술의 진리는 학적 진리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것이며, 그 진리는 하이데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도르노에게서도 담론적 진리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상정된다. 아울러 아도르노에게서도 이 진리의 생산은 ‘주체’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천재든 장인이든 미적 주체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를 통해 매개되는, 주체 밖의 어떤 사태의 표현이다. 그 진리는 주체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엄밀한 객관적 진리이다. 따라서 아도르노에게 예술가는 더 이상 미적 주체가 아니다. 그는 현실에서 진행되는 어떤 객관적 과정을 매개하는 영매(Mitter)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근대미학의 프로젝트의 본질적 요소 중의 하나인 미적 주체성은 해체된다.

 

 4. 작품미학

그런 의미에서 아도르노의 미학은 ‘작품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평의 과제는 더 이상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주관적 의도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에 재현된 세계와 작품 밖의 세계의 일치 여부를 가리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 객관적으로 들어 있는 것, 작품이 객관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포착하여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진리는 그 속에 들어 있는 미적 주체에 관한 진리도, 그가 재현으로 반영하는 세계의 겉모습에 관한 진리도 아니다. 미적 주체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안으로 들어온 현실의 객관적 과정에 관한 진리이다.

 

 5. 수수께끼

재현이 사라지고, 대상성이 무너지고, 서사적 연관이 파괴된 현대예술에서 작품의 구조는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현대예술의 작품 앞에 사면 그 작품의 배후에 우리가 밝혀내야 할 그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끝없이 해석을 시도하여, 그 수수께끼에 답을 내나, 그 답을 내는 순간 작품의 진리는 우리 앞에서 또 다시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끝없는 숨바꼭질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작품의 진리에 관한 최종적 해석을 거부하고 무한한 해석의 놀이를 풀어놓는 현대예술의 구조를 아도르노는 “수수께끼”의 은유로 표현한다.

 

 6. 해석 의존성

예술은 진리를 갖고 있으나 그 진리를 개념적으로 표현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예술은 해석은 요구한다.” 현대예술 작품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진리를 매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것의 진리는 본질적으로 해석을 그 상관자로 요구한다. 하지만 “관찰과 사유로 남김없이 밝혀지는 예술작품은 작품이 아니다.” 예술작품에는 아무리 해석을 해도 해석이 안되고 남는 부분이 있으며, 예술에 수수께끼의 성격을 부여하는 이 부분이 작품의 전체에 비로소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7. 생성으로서 예술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 그것에 대한 이해는 예술작품의 열린 성격, 수수께끼적 성격 때문에 본질적으로 운동, 과정, 생성의 성격을 띤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이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라는 것은 기술적으로 파악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정지된 그림으로서의 작품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탈근대적 관념을 대체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해석을 통한 이해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작품이 실현된다. 말하자면 진리라는 측면에서 예술의 생산과 수용은 동시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봉헌과 보존이라는 하이데거의 예술모델과 아도르노의 모델 사이의 구조적 동형성이 드러난다.

 

 8. 재료의 조직

아도르노에게 예술의 진리 내실은 작품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진리내실은 재료(물질)을 조직하는 과정 속에서 전개된다. 말하자면 재료를 조직하는 방식 그 자체에 예술작품의 진리성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형식은 침전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내용과 형식을 구별하는 근대의 작품 존재론은 붕괴된다. 내용/형식의 근대적 대립을 재료/처리라는 개념틀로 대체하면서, 아도르노는 예술적 avancement와 비판적 진리를 동일시한다. “예술 속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참되지 못한 것은 기술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 마디로 재료를 조직하는 데에서 벌어지는 기술적 실패가 곧 형이상학적 거짓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의 최고의 진리라는 문제는 작품 속의 조응이라는 범주로 번역된다.” 한 마디로 미적으로 성공한 것은 철학적, 사회적으로도 참이요, 미적으로 실패한 것은 철학적, 사회적으로도 허위라는 것이다.

 

 9. 예술의 진보와 퇴보

여기에서 아도르노의 사상과 아방가르드 예술 사이의 논리적 연관이 드러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재료에는 발전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어, 그것이 작품의 객관성을 이룬다고 한다. 이는 아방가르드의 미적 확신, 즉 진보는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난다고 보는 미적 진보의 논리의 이론적 표현이다. 재료에 내재된 객관성에 조응하여 미적 진보에 참여하지 않고 과거의 형식언어를 고집하는 예술가는 미적으로는 퇴행적일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는 반동적이라는 것이다.

 

 10. 새로운 것, 모더니즘의 이념

예술적 진보는 재료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 혁신적인 방법에 있으며, 이것이 단지 작품의 미적 질만을 결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작품의 발언력까지 결정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미적 모더니즘의 자의식이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더 좋은 것이다. 모던의 기관차로서 새로운 것의 이념. 재료와의 대결이 곧 사회와의 대결이라고 보고, 재료를 조직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고 믿었던 모더니스트들의 미적 확신이 아도르노의 이론 속에서는 이렇게 재료의 조직이 곧 진리의 생성이라는 견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11. 예술의 탈주

예술은 자기의 참을 개념적으로 분절화할 수 없기에 철학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동일성의 사유에 속하는 철학은 자기 혼자서는 참을 가질 수 없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철학의 합리적 구조, 그것의 동일성 논리는 현실의 복잡성을 파악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지배를 깰 수도 없다. 이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은 재료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점점 더 급진화해야 한다. 미적 성취는 언제나 대량복제와 시장의 필요를 위한 단순화에 의해 평가절하되기 때문에, 이 지배의 힘을 피하기 위해 예술은 점점 더 해석적, 급진적으로 되어야 하고, 그 결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예술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무는 것이다.” 운명을 건 이 끝없는 탈주를 통해 예술은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일 수 있다.

 

 12. 예술의 자율성의 환상 파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 예술작품은 사회와 비판적 거리를 취하나 체제로서의 예술은 역할 분담을 통해 체제에 얌전히 순응하며 그 일부분으로 기능하게 된다. 무비판적인 예술제도와 비판적인 예술작품 사이의 긴장. 아방가르드의 “반예술”의 전략은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관념 하에 자행되어온 이 낡은 관행을 깨뜨리고, 예술로부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조직하려는 존재미학적 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늘 실패하고, 그것이 실현되었을 경우에는 대중을 위한 오락문학이나 값싼 상품미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60년대에 새로운 아방가르드가 있었으나, 오늘날 더 이상 미적 강제성을 띠는 예술적 진보란 존재하지 않는다.

 

 ▶ 귄터 안더스, 미디어론으로서의 예술론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표명된 벤야민의 미디어론은 TV와 라디오의 등장과 함께 귄터 안더스에 의해 급진화한다. 망명객으로 미국에서 TV의 등장을 지켜본 안더스는 1956년 이 새로운 매체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오늘날 텔레비전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대부분의 비평은 이 독일 망명객의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

 

 1. 존재론적 중의성

텔레비전 영상은 현실과 가상이라는 전통적 대립을 무너뜨리면서 ‘팬텀’이라는 새로운 존재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그는 이를 “사물로 등장하는 형태”로 규정했다. 텔레비전은 허구이면서 동시에 사실로 등장하는, 그리하여 존재하면서 실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단지 중립적 매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과 모상의 존재론적 차이를 지우면서 그 자신이 현실의 직접성을 가지고 우리 앞에 현상한다. 텔레비전은 어떤 사실의 미리 선정된 측면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건에 대한 판단을 암암리에 미리 내포한다. 즉 텔레비전은 이미 그 안에 구조적 기만의 메카니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소비자로 하여금 점점 더 이미 내려진 판단에 더 의존하게 만들고, 나아가 이 의존성을 꿰뚫어 볼 가능성조차 앗아간다.

 

 2. 대중적, 유아론적 시각

텔레비전은 팬텀의 세계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낸다. 이를 안더스는 “대중적 은둔자”라 부른다. 벤야민의 영화 대중이 민주적이고 집단적인 대중으로 나타난다면, 안더스의 TV 대중은 이렇게 자기 집안에 갇혀 뿔뿔이 흩어진 “분열자”로 나타난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며 뜨개질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그밖의 일을 한다. 텔레비전을 볼 때에 인간은 이렇게 파편화한 행동의 집산으로 전락한다. 나아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인간은 자신을 ‘대중-인간’으로 전화시킨다. 텔레비전이 매개하는 지각은 더 이상 그리스적 의미의 ‘시각’도 아니고 헤브라이 전통의 ‘청각’도 아니고, 그저 ‘먹는 것’이다. 텔레비전 앞에서 인간은 엄마가 떠서 입 안에 넣어주는 밥을 먹는 어린 아이가 된다. 한 마디로 인간을 ‘구강기’에 고착시키는 것이다.

 

 3. 의미의 상실

텔레비전은 수용자와 세계 사이의 거리를 지운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텔레비전은 그것을 우리의 안방에 옮겨 놓음으로써 가깝거나 먼 사물들 사이의 공간적 차이를 지워버린다. 이때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여지는 사물이나 사건의 고유한 가치를 지워버린다. 세계는 오로지 볼거리를 제공하는 노출증 환자가 되고, 시청자들은 볼거리를 찾는 절시증 환자가 된다. 여기서 사물들은 고유의 가치, 고유의 의미를 상실하고 “중립화”한다. 최근에 유행하는 ‘리얼리티 쇼’란 실은 텔레비전 자체에 내재한 이 노출증/절시증의 가능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4. 가상과 현실의 전도

텔레비전이 현실도 아니고 더 이상 가상도 아닌 팬텀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대체해감에 따라 사람들은 어떤 사건의 사회적, 정치적 중요성을 ‘그것이 텔레비전에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어떤 사건의 재생 형태가 원본의 형태보다 더 사회적으로 중요할 때, 이때 원본은 재생을 지향해야 한다.“ 말하자면 현실 자체가 텔레비전 속의 가상의 모델에 맞추어 자신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드리야르의 유명한 ’시뮬라시옹‘ 테제는 귄터 안더스의 테제를 디지털 매체의 언어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인한 ’현실/가상‘ 구별의 해체. 이는 모던 예술의 대표적인 징후이기도 하다.

  <진중권 교수의 강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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