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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Young Bin's Works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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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개인들의 원자화와 분산화, 그들의 현존의 무상함, 그리고 그들의 집단적 대두를 근대의 징후로 꼽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이런 모던의 징후 읽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자, 동시에 그 동안 예술사에서 묻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 즉 ‘기술적 발전과 예술적 발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최초로 제기한 텍스트다. 오늘날 벤야민이 이 글에서 표명한 몇가지 견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이 텍스트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시의성을 잃지 않고 있다.

 

 벤야민이 ‘모던’이라는 시대에 새로 등장하는 경향으로 주목하는 것은 ‘기술복제의 가능성’이다. 여기서 그는 물론 당시에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사진과 영화기술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실 예술의 복제는 예술사만큼이나 오래된 현상이나 벤야민이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 복제가 예술적 생산 그 자체에 영향을 끼칠 단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의 “지금, 여기”, 즉 작품이 속하는 장소와 밀접히 결부된 현존성을 파괴한다. 그것이 문화적 전통 속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으로 작용하는 예술작품의 유일성. 그것을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이를 그는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현상하는 것”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작품의 근원적 기능, 즉 종교적, 제의적 기능이 아직까지 작품에 잔존한 흔적으로 본다. 벤야민에 따르면 현실과의 모든 관련을 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아우라를 보존한 ‘예술을 위한 예술’ 역시 일종의 신학, 즉 “예술의 신학” 내지 “부정의 신학”이라고 한다.

 

 복제기술은 이 아우라를 파괴한다. 여기서 벤야민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좀 문제성이 있는 결론을 끄집어낸다. “하지만 예술생산의 진정성의 기준이 파괴되는 순간, 예술의 사회적 기능 전체도 전복된다. 제의에 뿌리를 두는 대신에 그것은 이제 다른 실천에 뿌리를 두게 된다. 말하자면 정치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벤야민으로 하여금 이런 결론을 내리게 한 것은 제의적 가치 대신에 전시적 가치가 전면에 등장한 영화예술이었다. 특히 트레차코프의 혁명적 영화실험은 그에게 이 기능 변화 속에서 혁명적 의미를 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영화의 특성은 새로운 예술수용자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대중이다. 벤야민은 영화예술이 “이중의 의미에서” “분산된 지각”으로서 인간의 지각의 태도를 변화시킬 것이라 기대했다. 말하자면 영화는 뿔뿔이 흩어진 모던의 개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나아가 그들의 지각의 방식 또한 그는 아우라의 파괴가 예술의 민주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벤야민을 경악시킨 것은 영화예술이 가진 이 긍정적 가능성을 파시스트들이 “겁탈”했다는 사실이었다. 지각의 방식을 바꾼다는 영화예술의 긍정성이 파시스트들에 의해 ‘선동’의 수단으로 활용됐고, 나아가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파시즘을 강화하는 데에 복무했으며, 심지어 그것은 아우라를 파괴하기는커녕 더 큰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데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벤야민이 “정치의 예술화에 맞서 예술의 정치화”를 주장한 데에는 이런 상황의 인식이 깔려 있었다.

 

 벤야민에 대한 비판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도르노에게서 나왔다. 아도르노는 미국에서 대중예술의 자본주의적 상업화를 목격했기에 대중문화에 대해 벤야민보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는 대중의 비판적 의식을 각성하기는커녕 대중들의 극중 몰입을 완전히 보장하며 대중들을 체제순응적 존재로 길들이고 있었다. 아울러 영화가 파괴한다던 아우라가 스타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아우라의 생산기제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아울러 아도르노는 복제예술이 인간의 지각방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가령 음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진정으로 음악을 듣게 해주는 게 아니라 음악의 지각방식을 특정한 패턴에 고정시킴으로써 인간의 듣기 능력을 “퇴행적”으로 고착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벤야민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결국 아우라의 파괴가 자본주의 하에서는 진보가 아니라 진보의 왜곡으로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텍스트는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과 그것의 미래에 대한 담론에서 여전히 전범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새로운 미디어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다분히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입장을 새로운 차원에서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참고자료: 진중권의 벤야민 읽기 「아담의 언어」

 벤야민의 사상을 체계화하는 게 가능할까? 그의 글은 아카데미를 위한 논문이 아니다. 그의 학위 논문은 대학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평생 아카데미의 밖에 머물렀다. 그의 글들은 여기 저기 잡지에 기고한 평문들이고, 단편으로 이루어져 이렇다할 체계가 없다. 게다가 또한 문학, 철학, 역사철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벤야민의 글쓰기를 읽어낼 하나의 시각을 택하라고 하면, 나는 언어철학으로부터 접근하는 방식을 택하겠다. 이제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글, '언어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관하여'(1916)에는 그가 나중에 발전시킬 중요한 생각들의 단초가 이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신은 세상을 '말'로 창조했기에 모든 사물은 언어적 본질을 갖고 있다. 즉 목소리 없는 사물이 몸 안에 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 사물에 담아놓은 이 언어적 본질을 인간은 음성으로 '명명'한다. 바로 이것이 아담의 언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사물이 가진 이 언어적 본질을 무시하고 제 필요에 따라 거기에 제멋대로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언어는 한갓 수단으로, 자의적 기호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이 관행의 철학적 표현이 근대의 도구주의적 언어관이다. 여기서 언어는 더 이상 사물의 고유한 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 이것이 "언어에 대한 부르주아적 견해"다. 유태교의 신학의 옷을 입은 이 벤야민의 언어관은 한 마디로 근대적 '진보' 개념에 대한 비판, 즉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맘껏 조작하고 착취하는 부르주아적 '진보'에 대한 급진적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얼마 전에 제기된 영어공용화론. 언어는 수단이므로, 한국어보다 효용이 큰 영어를 모국어화하자는 이 주장의 바탕에 깔린 생각이 바로 벤야민이 비판한 근대의 도구주의적 언어관이다. 물론 이 견해는 동시에 모든 가치를 수량화하여 교환가치로 만들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천민 자본주의적 경향의 이론적 표현이리라. 사물을 그 고유한 가치에 따라 불러주던 아담의 언어. 벤야민의 철학적 기획은 잃어버린 이 아담의 언어를 되찾으려는 시도였다. 벤야민에게 사물화와 상품물신성의 세계인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사회혁명은 곧 인류가 아담의 언어를 되찾는 구원의 역사를 의미했다. 물론 우리는 더 이상 혁명을 믿지 않기에, 벤야민이 꿈꾼 신학적 구원을 세속화해야 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이 구원은 역사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끝으로 찾아온다. 이것이 근대의 목적론적 사관을 전복하는 그의 탈근대적 역사철학이다. 이 역사의-끝-이란 곧 선악의 나무 이전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 즉 실정법과 자연법의 악순환을 끊고 정의 그 자체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해체주의적으로 구원하려고 하는 벤야민의 법철학이다. 나아가 모든 사물에 언어적 본질이 있다고 말할 때, 그의 문화비평이 시작된다. 가령 고대의 폐허, 바로크의 바니타스, 파리의 길거리, 영화와 대중문화 속에서 그는 언어적 본질을 보고, 거기서 시대를 읽는다.

 

 그에게 비평이란 이렇게 '결코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는 것', 즉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벤야민에 따르면 도구주의적 언어관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아직 아담의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예술이다. 조각, 회화와 같은 예술언어에는 사물을 닮으려는 미메시스 기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언어는 음성이 결여된 물질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아담의 언어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미메시스의 기능이 있기에 예술은 언어가 다른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이해가 되는 만국공용어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예술은 침묵하는 사물이 가진 언어적 본질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번역?이다. 그리고 이 번역을 통하여 우리는 신의 창조를, 즉 옛날 아담의 언어로 했던 그 '명명?의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 <연세대학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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